태평양 전쟁 강제동원 희생자 80년만에 고향 땅에 영면
태평양 전쟁 강제동원 희생자 80년만에 고향 땅에 영면
  • 영광21
  • 승인 2023.12.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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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농 거주 최금수씨 회한의 사부곡 “평생 한 풀었다”
일제 강제동원 타와라서 숨진 고 최병연씨 사망자 1,117명 중 첫 봉환

 

“아버지 살아생전 꼭 부둥켜안고 ‘아버지’하고 불러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금수야’ 하고 불러주는 그 음성을 한번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늘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님이 다시 만나 서로를 꼭 끌어안고 이 생에서 못다한 이야기꽃을 피우길 기원해 봅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십시오.”
일제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강제동원돼 8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고故 최병연(사망 당시 25세)씨의 차남 금수(82)씨의 회한이다. 
홍농면 진덕리가 고향인 최병연씨는 1942년 11월25일 남태평양의 섬 타라와에 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이듬해 11월 미군과의 전투인 타라와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나섰다가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씨의 둘째 아들인 금수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사통지서’가 전부다. 금수씨가 태어난지 49일만에 강제징집돼 떠난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가 종이 한장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금수씨는 어머니, 첫째 형 향주(지난해 사망·86)씨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그는 “어머니가 밤새 베를 짜면 큰아버지님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며 “곡식이 떨어져 형과 내가 굶주린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집 뒤뜰에서 숨죽여 울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있다”고 옛 시절을 회상했다.
가난 때문에 첫째 형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2년만에 초등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금수씨도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했다가 2년 후 다시 4학년으로 입학해 겨우 졸업했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외로울 때마다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군복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힘을 얻었다. 
그러던 지난 2019년 정부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에 희망을 안게 됐다. 정부가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한국인 유해와 한국 유족 유전자(DNA) 일치 확인작업 결과 ‘타라와 46번’으로 불리던 유해가 형제의 DNA와 같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금수씨는 “처음 아버지와 DNA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믿기 어려웠다”며 “관련 기관에 재차 확인한 후에야 유해라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금수씨는 “‘살아서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 싶다’며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던 형이 지난해 겨울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아쉬움이 크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최씨의 유해는 3일 오후 인천 국제공항으로 봉환됐다. 신종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등으로 그동안 현지에서 봉환하지 못하다 지난 9월 미국 국방성에 의해 하와이로 옮겨져 이날 그리운 고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지난 80년의 세월 중 유해 한줌도 찾지 못한 76년의 세월보다 신원이 확인됐지만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던 지난 4년이 가슴 사무친 시간이었다.  
금수씨는 “애타게 강제징용 피해자의 소식을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한도 풀리긴 바란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남아있다”며 “약소민들을 데려다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강제징집한 것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당연하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입장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유전자 대조작업 결과 타라와 전투에서 사망한 한국인은 현재까지 1,117명으로 확인됐다. 희생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것은 최씨가 처음이다. 
최씨의 추도식은 4일 오후 2시 영광문화예술의전당에서 정부 주관 행사로 거행됐다. 추도식에는 고인의 유족과 이상민 행안부 장관, 강종만 군수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상민 장관은 추도사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은 국가의 책무이자, 가슴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중요한 일이다. 정부는 마지막 한분의 유해를 봉환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