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병의 역사문화 재발굴은 민족사의 새기록
영광의병의 역사문화 재발굴은 민족사의 새기록
  • 영광21
  • 승인 2024.01.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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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지역 한말의병 항쟁과 절의정신 ③ - 영광의병길 조성과 문화유산 활용
격전지였던 영광읍성과 법성포진성…한말의병 생가 유물 유적 발굴은 후세대의 사명

영광의병들의 일제에 타도에 대한 항쟁과 절의 정신은 매우 격렬하였다. 1906년부터 1910년 사이 일제와 격렬하게 투쟁하였던 영광의병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 영광의병 관련 기록물로는 <의소일기>, <삼의사전>을 들 수 있다. 일본 사진 자료로는 <일한병합기념사진첩>은 의병들의 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둘째, 영광의병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의병장 생가’, ‘영광읍성’, ‘법성포 진성’ 등이 있다. 각기 거점을 선택해 법성포에서 영광읍성까지 걷는 ‘의병의 길’ 조성으로 새로운 힐링도시로 재생산할 필요가 있다.

1) 후은 김선생 신담록
후은 김용구의 문집 <후은김선생신담록後隱金先生新膽錄>은 2권 1책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이 <의소일기義所日記>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기울자 후은 김용구는 학문을 접고 일제 타도의 길에 나섰다. 
그는 농부에서 승지에 이르기까지 지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가 쓴 일기는 영광의병의 전략, 의식주, 군사, 이동경로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일기는 당시 의병을 이해하는데 문화유산으로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1905년 첫 봄을 시작으로 손수 쓴 문헌으로는 오직 이것만이 남아 있다. 
1907년 정미丁未 8월8일 기삼연과 같이 나라의 원수 갚을 것을 맹서하며 시작된다. 1908년 무신戊申 4월13일까지 약 8개월간의 기록이다. 4월17일 전투에서 2곳의 총상으로 군권을 박포대에게 이양하고 금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탄식한 충절인 이다. 이러한 기록물은 뮤직컬, 유튜브, 에니메이션, 어린이 만화, 군민독본 등으로 재발견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2) 의병장 생가
영광의병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의병장 생가’ 이다. 이 중에서 ‘의병장 생가’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일제가 작성한 <편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추적할 수가 있다. 주소지는 국가보훈처 전자공훈사료관에 수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하였다.
㉠ 김용구
본적: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 677
훈격(서훈년도): 독립장(1968)
공적개요: 1907. 8.8.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100여명을 모집하여 영광읍에서 교전하였다. 1908. 1.3. 의병대장으로 의병을 인솔하고 금태원 부대와 합류하여 400여명의 병력으로 확대되어 나주읍을 습격하여 약 8시간의 교전 끝에 순사를 사살하고 무기고를 점령 무기를 탈취(폭도편책 광비발 제12호). 1908. 5.1. 이후 총상으로 인하여 무력활동이 불능케되자 산중으로 피신. 1918. 12.26. 고종 승하비보를 듣고 비통 끝에 자결순국.
◎ 김기봉
본적: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 677
훈격(서훈년도): 애국장(1991)
1907. 8.8. 영광에서 부친인 김용구가 거병하니 부친을 돕기 위해 종군하여 고창군 안상전투에서 전사 순국.
㉡ 이대극
본적: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771
훈격(서훈년도): 독립장(1990)
공적개요: 1906년 봄 영광에서 기병하여 일본군과의 전투. 영광 법성포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 1908. 1.2. 기삼연 맹주가 일군에게 피체되어 순국하게 되자 뒤를 이어 맹주가 되어 진용을 갖춘 후 적군과 교전. 장사산에서 유진하고 있을 때 수급에 현상금이 걸려 있음을 안 배반자에 의하여 참살 순국함.
㉢ 김익삼 
본적: 영광군 남면 대덕리 989
훈격(서훈년도): 애족장(1990)
공적개요: 1907. 9. 장성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고 성재 기삼연을 의병대장으로 하고 김용구가 통령이 되자 그의 휘하에서 무기와 식량의 조달을 책임졌다. 1910년 국치 이후 성명을 봉섭鳳燮으로 바꾸고 두문불출.
㉣ 김형식
본적: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447
훈격(서훈년도): 애족장(1990)
공적개요: 1907. 8.8. 족질 김용구 의병장 기참연과 함께 동맹하여 기의하자 박용근, 오태윤, 이영화 등과 같이 의병 수십명을 모집하여 의진을 갖추게 하고 영광 연곡사 등지에서 전투한 사실이 확인됨.
㉤ 오태윤 
본적: 영광군 영광읍 우평리 192
공적개요: 1907. 8.8. 김용구는 기삼연과 거의하여 박용근, 김형식과 같이 의병 수백명을 모집 적을 토벌하는데 활동. 1907. 12.에 의진 재편성시에는 좌익 김창복, 호군 박용근과 같이 종사로 임명되어 일군과 전투사실 확인됨.

화가 안중식이 1915년 영광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린 영광풍경도

 

 

3) 영광읍성
영광읍성은 영광읍 백학리에 위치한다. 영광읍성은 고려시대의 우산성牛山城과 조선시대의 성산성城山城으로 구분된다. 
우산성은 읍의 남쪽 우산공원 뒷편에 축성하여 ‘고성재’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주차장 안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세종실록> 중 세종 3년조에 공사를 시작하여, 세종 5년 계묘조에 영광읍성을 완공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영광군조에 ‘읍은 석성으로 둘레가 547보이다.’라고 하여 ‘우와산고읍성’을 기록하고 있다. 문종 1년(1451) 8월 기사를 보면,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충청·전라·경상도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 정분의 계본啓本에 영광군읍성(우와산읍성)은 주위가 2,712척, 높이가 10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1척 6촌이며 적대敵臺가 2개소, 3개소의 문 중에 2개의 문은 옹성이 없고, 여장이 462, 성안에 샘이 6개소가 있으며 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단종 즉위년(1452)에 “영광의 축성군은 그 수를 줄이도록 하고, 유포의 석보 수축은 정지하도록 하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는데,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제 듣건대 여러 고을의 축성의 역사役事를 파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파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금년에 밀·보리와 올곡早穀·늦곡晩穀이 모두 여물지 못하여 백성의 생활이 가히 걱정스럽습니다. 변읍邊邑의 성참城塹 적대敵臺의 수축 및 유포의 석보石堡와 영광·함흥의 읍성 역사를, 청컨대 모두 정지하소서.”하니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고 병조에 전지하기를, “영광의 축성군築城軍은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적당히 그 수를 감하게 하고, 유포의 석보 수축은 우선 이를 정지함이 옳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궁실조를 보면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객관 신숙주의 기문에, “군이 여러 번 왜구의 난을 당하여 공관이 쓸쓸하다. 예전에는 읍의 남쪽 산기슭에 있었다는데 그 산수가 등지어 가고 지리가 불순한데, 더욱이 성보城堡는 낮고 무너지고 공관은 비좁기 때문에, 단종 즉위년(1452)에 읍 사람들이 사유를 조정에 아뢰어 성을 우와산의 동쪽으로 옮기니, 험준하고 견고하며 넓고 평탄하며 주위가 넓게 트여서, 안에 관사와 창고, 미곡 창고를 세울만하였다. 그해 가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이李·정鄭 두 군수를 겪었어도 오히려 진척이 없었다. 세조 2년(1456) 봄에 이르러 지금 군수 여흥 민효원 공이 뒤를 이어 군수가 되어 앞 사람이 아직 세우지 못한 것을 세우고 앞 사람이 끝내지 못한 것을 끝내어, 문과 창을 내고 단청을 환하게 하니, 영광군 사람들이 모두 경축하였다.”고 하였다.
세조 2년 병자(1456) 12월25일 병조에서 아뢰기를, “영광 등 여러 읍邑은 모두 바다와 접하여 방어가 가장 긴급합니다. 이미 읍성을 쌓았으나 지킬 군사가 없으니, 여러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차로 경내의 일 없는 사람閑役人을 찾아내어 기병·보병으로 삼아서 수를 갖추어 도절제사에게 보고하여 계문啓聞하고, 번番을 나누어 방어하여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고 완휼完恤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 성곽조에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469척, 높이가 6척이고, 안에는 9군데의 샘이 있다.”고 하였다. 읍성의 동문은 빈양루賓暘樓라 하여 현 영광여중 자리이며, 서문은 정서문靜西門으로 영광군 농촌지도소 뒤에 있었고, 남문은 진남루鎭南樓로 영광우체국 앞에 있었고,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했으며 영광읍 무령리 북문재 구도로에 있었다.
아사는 근민당近民堂, 내아內衙, 운금정雲錦亭, 객사客舍가 있었다. 근민당은 고을원이 집무하는 동헌을 말하며 현 원불교 자리에 있었고, 내아는 내동헌, 지방관청 안채 관사를 말하는데 옛 읍사무소 자리에 있었으며, 운금정은 군수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하였는데 전 군청 구내식당 자리에 있었으며, 객사는 전패殿牌와 궐패를 봉안하고 영빈관으로 쓰였던 공청公廳으로 현 영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향사당鄕社堂은 좌수左首, 군유림郡儒林 대표로서 현 자문위원 행정처로 현 군수관사 자리에 있었다. 장청將廳은 수교首校(현 사법관司法官), 좌우병방左右兵房(도정장교道政將校)의 봉공청奉公廳은 호장戶長이 호적재무戶籍財務의 집무를 하는 곳으로 현 군청 내에 있었다. 형청刑廳은 형방의 봉무청으로 현 경찰서에 있었고, 노반청奴班廳은 노녀奴女의 가무연습소로서 구 경찰서장 관사에 있었으며, 장방청長房廳은 사령들이 집무하는 곳으로 죄수를 가두어 두는 유치장과 같은 관청으로 구 협동인쇄소 자리에 있었고, 봉공청은 원님의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전 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며, 작청作廳은 사언史彦의 봉공청으로 현 경찰서 자리에 있었고, 사창社倉은 사환미社還米를 보관하는 창고로서 현 등기소 자리에 있었는데, 영광에는 20,000석을 비축하였다. 훈련청訓鍊廳은 천총千總(군사 천명을 통솔하는 사람)이 집무하는 곳으로 현 경찰서 자리에 있었다. 서청書廳은 세금을 부과 징수하는 곳으로 현 창문사 자리에 있었으며 문루는 군수가 군민에게 유세하는 누각으로 현 군청 정문에 있었다. 호장청戶長廳은 호적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 군수관사 북편에 있었는데 지금 유적으로는 정주 운수사에 있는 성의 일부와 경찰서 뒤 공중 샘으로 쓰고 있는 객사샘 하나만이 남아 있다. 
유사한 사례로 성곽 일부구간을 복원한 ‘보성읍성’의 경우 성곽 내부에 있었던 누각 ‘열선루’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희경루’ 복원과 화순군의 능주면의 ‘능주목 관아’의 복원 사례를 들 수 있다. 최근 나주시는 역사문화 복원사업 일환으로 ‘나주목’ 복원을 시도하면서 4대문을 복원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영광읍성의 상징성이 있는 운금정雲錦亭이 공공정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광읍성의 역사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공공정자의 경우 주민공론화를 거쳐 복원할 필요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심전 안중식 그린 ‘영광풍경도靈光風景圖’는 영광읍성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 실제 독자들의 눈에도 사진을 보는 것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4) 법성포 진성
법성포 진성은 전라남도 기념물(제205호)이다.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947번지 일대에 위치한 법성포 진성은 2차례의 조사가 실시되어 어느 정도 그 성격을 살필 수 있다. 법성포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유수한 항구로서, 최소한 고려시대 이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창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조창을 방비하고 조운선을 호송하기 위하여 군사가 주둔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늦어도 조선 태조 7년(1398)경에 수군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병력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법성진에 진성이 축성된 것은 중종 9년(1514)이었으며, 석성으로 축조 되었다. <법성진지도>에 의하면 동벽에 상동문과 하동문의 문이 있고, 서벽과 남벽에 각각 문이 있었다. 그 성내에 동헌을 비롯하여 내아, 문루, 장청, 작청, 동조정, 해창, 남고, 객사, 세곡고, 제월정 등이 있고, 성 밖에 사창, 군기고, 사정 등이 있으며, 해안에는 병선과 전선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순조 7년(1807) 법성진에 큰 재앙이 닥쳤다.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400여호가 잿더미로 변하였으며, 관아는 물론 조운선 17척까지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 후 1895년 갑오개혁 때 법성진이 폐쇄되면서 법성진성도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법성포진성은 한말 의병투쟁 시기 치열한 격전지이었다. 조선 후기 <지방지도>에서 사창의 형태를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병전적지 문화유산의 활용은 군민 정체성과 긍지를 높이는 척도 이다. 그러므로 군민의 세독충정世篤忠貞 정신을 발굴하기 위하여 ‘해창기념관’ 건립 등의 추진이 필요하다. 
유사사례로 보성의 보성의병관, 보성의 나철기념관, 해남의 명량대첩해전사 기념전시관, 순천의 호남호국기념관박물관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보성의 의병장 안규홍의 생가 경우 보수 정비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5) 영광의병의 길
영광읍성터지에서 법성포진성터지까지 걷는 의병의 길 조성은 새로운 명소 둘레길로 재생될 수 있다. ‘영광의병의 길’ 구상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거점과 거점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의병의 생가(영광의병 기념관), 영광읍성, 법성포 등을 연결하는 트라이 형태로 구상할 수 있다. 유사 사례로, 무등산옛길, 남도이순신길 백의종군로, 남도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등을 들 수 있다.

맺는 말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영광의병의 항쟁과 절의정신은 일제 타도와 국권회복에 있었다. 영광의병 서훈자는 19인이며 영광의병 미서훈자는 81인이다. 앞으로 과제 중 하나가 영광의병의 지속적인 공적 발굴과 함께 합당한 서훈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영광의병은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태에서 군민 모두가 일심으로 일제를 막아 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영광의병은 매우 조직적으로 무장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는 영광의병이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영광군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게 국가의 명운이 넘어가자, 영광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일찍부터 의병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남산 출신 이대극이나 김용구 등이 대표적이다. 
1906년 김용구는 일심계를 조직해 이들 중 일부를 의병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1907년 8월12일 영광의병은 읍성 공략하고 그 군세를 몰아 연해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는 일본인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이 법성포구로 밀려드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력 11월3일 영광의병은 법성포 공략에서 일제의 모든 것을 소각하였다. 
영광의병들은 법성포를 수륙으로 공격하였다. 오직 일제타도에 목적이 확고하였다. 이것은 영광의병이 지닌 강력한 저항 정신의 표상이자, 끈질긴 의병투쟁 역량이다. 그러기에 영광지역 한말 의병들이 남긴 생가와 유물 유적의 발굴 조명은 이 시대에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영광의병의 역사문화자원을 재발굴하는 의미는 민족사의 새로운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영광의병의 전모를 기록한 김용구의 <의소일기>는 의병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이다. 이러한 기록물은 뮤직컬, 유튜브, 에니메이션, 어린이 만화, 군민독본 등으로 보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영광의병의 높은 절의 정신을 크게 선양 발굴하자는 것이다. 
1906년부터 1910년 사이 생성된 영광의병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은 ‘의병장 생가’, ‘영광읍성’, ‘법성포 진성’ 등이다. 영광읍성의 경우 의병들이 두 차례의 대전을 벌인 곳이다. 지금은 터지로 남아 있는 영광읍성과 법성포진성을 연결하는 ‘영광의병의 길’ 구상은 공론을 필요로 한다. 아울러 의병장 김용구를 비롯하여 영광의병장 생가 발굴은 시급한 역사발굴의 현장이라 하겠다. 
전국 최고의 조창이 있었던 법성포는 남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럼으로 ‘조창기념관’이나 또 다른 ‘파시전시관’ 등의 건립을 위한 제안이 필요하다. 이것은 영광군민의 정체성 확보와 자긍심을 세우는 길이다.
노기욱 / 호남의병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