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등 만주 노령에서 독립운동 전개
헤이그 특사 등 만주 노령에서 독립운동 전개
  • 영광21
  • 승인 2005.12.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월의 독립운동가 - 보재 이상설 선생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향촌 선비인 부친 이행우와 모친 벽진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궁내부 특진관 학부협판 법부협판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했다. 1904년 6월 토지를 침탈하기 위해 일제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상소를 올려 반대하고, 보안회 등과 함께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선전하는 활동을 펼쳐 철회하게 만들었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가 민영환이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자결, 순국하자 종로거리에서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운동을 촉구하면서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선생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외교특사로 임명돼 비밀리에 파견되어 헤이그에서 이 준 이위종과 함께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했다.

선생은 또 1910년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의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하고, 경술국치 직후 성명회를 조직해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나아가 1914년 만주 노령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고,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3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었다.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