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추억의 발자국을 남기다
이기효 / 서울특별시 마포구
나는 영광군 출신의 아가씨와 결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나에게 흔히 말하는 고향과 같은 개념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삶은 늘 서울의 빠른 일상과 복잡함 속에서 이루어졌고, 자연이나 전통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하고, 발전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도시에 맞춰 나는 자랐고, 그런 환경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아내를 만나고, 그녀의 고향인 영광을 찾으면서 내게도 무언가 정서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고향’이라는 감각이 생긴 것 같았다. 영광은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쌓이면서 내 마음 속에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혼 초, 우리는 서울에 살면서 가끔 처가집에 내려가곤 했다. 아내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골의 여유로움, 사람들의 따뜻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주는 그 고요함이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가끔씩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영광에 오면 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이 자주 다니신다는 불갑사를 찾게 되었다. 영광군에서도 한적한 곳에 위치한 불갑사는 이름만으로도 그곳에 깃든 역사를 짐작하게 했다. 특히 그곳에서는 상사화라는 꽃이 아주 유명하다고 들었다.
상사화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붉고, 그 붉음이 마치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사화는 한 줄기로 길게 올라온 꽃대 끝에 가지런한 꽃잎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형상은 마치 팔을 벌려 세상을 안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붉은 꽃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고, 자연이 주는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불갑사에서 상사화를 바라보며 나는 아내와 장모님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아내는 어릴 적 장모님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불갑사는 그들에게 단순한 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장소였다.
그곳에서 봄날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상사화를 구경하고, 소풍을 즐기던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사화는 그들에게 있어 아름다움 이상의 감정, 즉 유년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꽃이었다.
아내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불갑사와 상사화가 그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 그 이야기들은 곧 나의 이야기로 다가오며, 그 꽃과 장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나도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도 자녀가 생겼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우리는 다시 불갑사를 찾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의미 있는 추억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상사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바라본 상사화는 처음 불갑사를 찾았을 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때는 그저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는 데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이 꽃이 우리 가족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상사화를 보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나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곳에 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장모님이 이곳에서 나눈 추억, 그리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만드는 추억이 이 상사화와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느꼈다.
불갑사는 이제 세 세대가 공유하는 장소가 되었다. 장모님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내가 그 뒤를 따랐으며,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그 추억을 이어받았다. 나는 아이들이 커서도 이곳을 기억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불갑사의 상사화는 그저 빨간 꽃이 아니라, 이 장소와 그 꽃을 매개로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시간들이 하나로 엮여간다.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 이곳을 다시 찾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불갑사는 우리 가족에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공통의 장소로, 그리고 추억이 깃든 고향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불갑사를 떠나기 전, 가족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핀 배경을 두고 우리는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앞으로 우리 가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불갑사는 이제 나에게도 고향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남기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세대가 계속해서 공유하게 될 장소로 남을 것이다.
상사화는 매년 같은 시기에 피어나듯이, 우리의 추억도 매년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비록 꽃이 시들고,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더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나눈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
불갑사의 상사화는 세대를 잇는 다리처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이곳에서 나눈 소중한 순간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리고 우리 가족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자리 잡을 것이다.
이제 불갑사는 단순한 절이 아닌, 우리 가족의 고향이다. 서울에서만 살며 고향이 없던 나에게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생겼고, 그곳은 단순한 장소를 넘어서 우리 가족의 기억과 사랑이 담긴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