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영광불갑산상사화축제 기념 인터넷 공모전 수상작 - 동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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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21
  • 승인 2024.11.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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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으로 피었다
홍선경  / 전남 영광군  

엄마의 손등에는 핏빛으로 멍든 꽃이 피어 있었다. 
팍팍한 삶을 고막이 터지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으로는 부족했을까? 엄마의 쌓인 울분은 주먹으로 담벼락을 내리쳐, 피를 보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등에 핀 꽃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 꽃은 깊고 깊은 어둠을 뚫고 붉은 점 하나로 관통하는 찰나에 피어나는 붉은 꽃무릇이었다. 돋아난 줄기에 설움의 눈물을 채우고, 누르고 눌러도 터질 것 같은 붉은 가슴이 등살이 휘어지도록 피어난 꽃이었다. 

붕대 감은 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의 모습이 이상해서 풀어헤쳐 보았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이기에 참아야만 했던 삼십 년 세월 속에 엄마의 서럽디 서러운 울분이 시멘트 담벼락을 내리친 것이다.
미움에는 이유가 없는 듯했다. 할머니는 유독 며느리 중에 우리 엄마를 미워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추운 한파가 지나갈 2월 말,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할머니는 엄마가 지은 밥이 되디되다며 자신을 못 먹게 하려고 그렇게 밥을 했냐고 핀잔과 더불어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던 날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불쌍했다. 그리고 엄마가 우리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심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가 엄마가 아침에 호미를 들고 저쪽 보리밭으로 가셨다고 했다. 아침도 점

점심도 먹지 않았을 엄마를 생각하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밥을 불을 때서 짓고, 김치 한 가지를 담아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 보리밭으로 갔다. 그런데 엄마가 보이지 않아서 밭두둑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추운 곳에서 누워 있던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ㅇㅇ아, 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차려온 밥과 찬을 내밀었다. “엄마, 밥 안 먹었으니까 먹어”라고 말했더니 서러움에 끅끅 울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심었던 첫 오이를 먼저 따 먹었다고, 성경책 손에 쥐어주었더니 교회 오지 않았다고, 못 배워서 어쩔 수 없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그렇게도 밉다고… 아버지와 엄마 사이를 이간질까지 하시며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우리 엄마를 괴롭히는 그런 할머니를 나는 좋아할 수 없었고, 마음 깊이 미워했다.

시집올 때부터 며느리를 미워했기에 엄마는 되도록 피하려 했고, 시간이 갈수록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고 했다. 가시 박힌 쓴소리에 마음 절이고 싶지 않아 귀 막고, 눈 가리고, 입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속내를 꺼내 보일 사람도 없었고, 꺼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긴 세월 퇴적되어 온 설움과 한이 환갑을 지나서야 손등에 핏빛 꽃으로 피었던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절규의 외침이었다. 
여든이 넘어서도 할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타박은 식지 않았다. 틈새 낀 아버지의 말 한마디는 더 독한 서러움으로 가슴을 메웠던 내 엄마는 ‘화병’ 진단을 받았고, 갈수록 할머니 대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날도 자처해서 주위 분들과 먼 곳으로 일하러 가셨다. 집 떠나온 첫날 밤에 꿈이 너무도 희귀해서 불안해하며 하루 일을 마칠 무렵,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크고 흰 구렁이가 엄마의 가슴팍을 칭칭 감고 숨을 조였다. 엄마가 숨을 쉴 수 없어 헉헉이고 있을 때, 흰옷을 입으신 외할아버지가 나타나 몸뚱이로 흰 구렁이를 내리치자, 구렁이가 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서야 엄마는 숨을 쉬었다는 꿈이었다.
시집오던 날부터 흰머리 엉성해진 이날까지 큰 구렁이로 온몸 칭칭 감아 숨 조이시더니 힘 풀어 버리고 가시던 날에 며느리는 낯짝이 외꽃이 되도록 울고도 또 울었다.

지금은 여든다섯인 우리 엄마는 치매다. 치매도 서러운 치매인지 매일 울기만 한다. 
살아온 생에 가슴에 응어리로 남은 생각들로 눈물짓고, 다른 것은 다 잊었어도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의 앞 구절은 잊지 않으셨는지, 매번 울다가 부르는 노래다. 깡마른 울 엄마 골반뼈가 도드라진다. 
이제는 등이 휘도록 꽃봉오리 펼쳐 내던 힘도 사라지고, 불갑산 자락에 져가고 있는 꽃무릇같이 엄마의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다. 
할머니와 내 엄마는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잎과 꽃으로 만나서는 안 되는  상사화 인연이었다. 혹여라도 이승의 인연이 저승에서 다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촉촉한 가을에 꽃무릇을 바라본다. 

 

 

 

내 편
박진옥  / 대구광역시 서구

늘 아득한 한 개의 소실점이었다

젊을 땐 서슬 퍼런 시집의 울타리 아래
하얀 서류 뭉치인 양 빨랫감 가방 한 손에 들곤
일주일에 한 번씩 나타났다 사라지던

이젠 양손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 
어쩌다 말의 둑 터져 범람이 되면 
그 속 허덕여 어푸거려도 눈길 한번 주질 않고
오르막길 쌕쌕거리며 따라붙어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야차 같다가도
북풍 속 조그만 심장으로 
혼자 떨고 있을 때
등 어루만져 토닥이는 손길

그래서 밉다가, 밉다가
마지못해 그립기도 든든하기도 한

하나에 하나를 보탠 
가녀린 꽃잎 모여
붉은 꽃망울 항상 한 곳 응시한 채 
꽃대 지면 달릴 잎사귀 기다리던 나날들
초라하고 여윈 그림자 마냥
아주 조그만 
실은 
커다란 진실 하나 품고 산 상사화처럼

남의 편인 줄 알았던 남편 

늘 내 편이었다는

 

 

 

영광으로 가는 길
장헌권  / 광주광역시 광산구  


가을 하늘은 티없이 말갛다. 광대한 햇살의 바다를 보기 위해 송정 영광통을 지나서 무엇보다도 백수해안도로를 걸었다. 송이도에 도착하여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땅의 어울림 그대로다. 
가장 먼저 능선을 가득 드리운 불갑사를 향하는 발걸음은 묵언으로 고독한 고요를 즐긴다. 높은 나무와 우거진 숲이 아늑하기만 하다. 고즈넉한 산속의 사찰이지만 세상과 조화가 되는 푸른 잎사귀가 빛나고 있다. 

불갑사는 백제 때 진나라에서 건너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 출신 마라난타 스님이 창건을 했다. 4세기 말 백제 땅에 최초로 세운 사찰인 만큼이나 양지바르고 산림이 무성한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마라난타 스님이 영광 법성포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불갑산 자락을 본 곳은 당연하다. 
돌계단을 올라 사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가 나온다. 그 뒤에 단아한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은 정면 문살에 다섯 가지 꽃무늬로 장식해 작지만 화사하기만 하다. 대웅전의 불상은 정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좌측에 앉아 있다. 독특한 형태는 드문 일이지만 부석사 무량수전, 마곡사 대광보전 그리고 불갑사 세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제 대웅전을 지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지난 9월에 불갑산은 상사화가 온 천지다. 사찰 아래 사하촌 냇가부터 붉은 꽃의 바다는 햇살이 찬연하다. 사하촌에서 절 오르는 길, 불갑사 뒤편 저수진 부근 동백골, 구수재, 연실봉을 지나 다시 불갑사로 돌아오는 길은 사찰 안팎으로 꽃무릇 길로 붉은 영광은 짙어지기만 하다. 

점심은 맛 중의 으뜸 굴비를 빼고는 영광이라 할 수 없다. 조기는 생선 중에서 맛이 최고다. 특히 꼬득꼬득 말린 굴비의 맛은 별미다. 굴비 한 마리를 가지고도 밥 몇 그릇은 거뜬하니 밥 도둑이다. 자린고비 때 굴비를 천정에 매달아 놓고 삼시 세끼를 다른 반찬 없이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듯 싶다. 
이처럼 영광굴비는 살맛나게 하는 입맛으로 최고다. 바로 그 굴비를 만드는 곳이 법성포다. 법성포는 독특하다. 바다 앞에 자리한 포구가 아니라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뭍으로 조금 들어간 지점에 자리한다. 포구에 서서 보면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물길이 구불구불 나 있다. 필자는 구불구불 난 물길을 보면서 정호승 시인의 ‘바닷가에 대하여’ 라는 시 한 구절이 생각이 난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게 좋다” 저 구불구불한 길은 나의 바다가 되어 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담아 마음에 밑줄을 그어 편지를 써 보낸다. ‘너는 내것이다’ 조용한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주인의 살가움과 함께 굴비 맛은 평범한 입의 감동이다. “굴비는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씨알이 굵은 참조기를 법성포로 가져온다. 이곳에서 만 분다는 특별한 바람이 있다. 바로 하늬바람에 말린다. 그리고 천일염으로 염장한 것이 원조 영광굴비라”는 주인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 말리지 않고 물기만 뺀 다음 바로 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니 문득 ‘굴비’라는 이름의 뜻이 머릿속에 울림을 준다. 
고려시대에 고려 17대 인종 때 이야기다. 이자겸이라는 사람이 셋째와 넷째 딸을 왕에게 시집 보냈다. 세도정치를 하던 중 오얏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척준경 등 배신으로 법성포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곳에서 맛본 굴비 맛이 너무 좋아 임금에게 진상을 하게 된다. 이 맛을 본 임금이 귀양살이를 풀어주었다. 당연하게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을 드러낸 것이다. 
역모로 귀양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귀양에서 풀어진 것은 아니다. 병을 얻어 이자겸은 죽었다. 이자겸이 굴비를 진상하여 풀려났다는 것은 설득하기 어렵지만 자기의 옳은 뜻을 굽히지 않겠다 뜻으로 굴비屈非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의미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도 가짜뉴스와 온갖 폭정에 정의와 진실에 굴복하지 않는 굴비 정신을 마음에 새기면서 포구에 작은 어선들과 갈매기들이 너울거리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달빛이 노니는 섬을 향했다. 
빛의 동네 영광에서 아스라한 낙월도 빼고는 어찌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치 세상의 모든 평온함을 끌어당겨 섬이 적요한 풍경으로 물들어 있다. 바다에 뿌리 내린 풀 숲인 듯 푸르스름하다. 
낙월도는 나당 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하자 왕족 중 한명이 바다로 피신했다. 암흑이 내린 광막한 바다에서 항로를 잃고 헤맨 그는 지는 달빛을 따라 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법성포에서 바라본 섬이, 지는 달처럼 생겼다. 그러니 ‘진달이 섬’이다. 
이처럼 낙월도는 달과 관련이 있는 섬이다. 필자도 달을 만진 손으로 바다 한가운데 문장을 써본다. ‘광대한 달빛의 바다 영광’이다. 
상낙월과 하낙월 두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걸어서 소통을 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찬찬히 걷는다. 나지막한 경사로를 통해서 황톳빛 바위와 황금 모래가 적요에 잠긴 숲을 떠받드는 작은 해변에 몸을 밑긴다. 
가냘픈 물결이 해변 언저리와 섬들이 속삭인다. 아득한 바다가 수평선에 황홀함을 오래 보면 시인이 된다.

하늘과 바다가 모래 풍광에 춤추는 가운데 간간이 바닷소리 장단에, 그리움에 서해의 가슴을 만져본다. 살그머니 초록빛으로 다가오는 청량한 소리에 눈을 감고 입술을 포개본다. 
어느 순간 시야가 열리고 환한 바다가 보인다. 
평온한 마을과 가없는 바다 숨결에 숲과 꽃의 정취가 사방에서 다가온다. 느슨하게 내려온 햇살이 바다를 광대한 빛으로 물들였다.
쪽빛 바다에 띄운 낙원의 꿈을 꾸면서 살가운 상낙월 전망대에 오른다. 달이 떨어지는 곳에 비치는 영광의 섬에서 서쪽의 수평선에 걸친 태양이 붉은 기운을 올리면서 장광을 이룬다. 불그스름한 낙조가 하얀 세상으로 번진다. 드디어 영광의 찬란한 빛이 세상에 서서히 적신다.
이처럼 영광으로 가는 길은 세상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마음의 고향이다. 

 

 


상사화 
박연식  / 광주광역시 서구

경비는 표정 없이 예초기로 휘두른다
몸이 오싹오싹 움츠린다
안 돼 안 돼 작년에 보았어
그 소나무 근처 사랑스런 꽃

그대 잘려 나가지 않고 꽃으로 피어
한 방울 눈물어린 혓바닥 붉게
이 가을 기도처럼 오는가
빈곤한 사랑 비옥하게 핥아 주는가

한 방울 눈물에 담긴 세월
애틋한 몸짓으로 이 선한 기도
찬란한 부활로 네 탯자리에서
해마다 희망의 종소리로 울려 주려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