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으로 영국의 유명한 경험론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불과 16세에 프랑스 주재 영국대사의 수행원을 시작으로 변호사, 선출의원 등을 거쳐 법무부장관, 대법관을 역임하고, 얼반츠 자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공직으로 보자면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최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이컨은 씀씀이가 커서 빚을 많이 졌고, 이 때문에 소송에 많이 휘말렸다. 베이컨은 소송 당사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뇌물을 받았고, 의회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아 런던타워(감옥)에 며칠간 갇혔다가 파면됐다.
그는 만년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베이컨의 사례는 뛰어난 능력의 공직자라도 청렴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준다. 베어컨은 자신의 이런 뼈아픈 경험을 성찰하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특히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한다. “돈은 좋은 하인이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 오래전 출현한 탐관
탐관의 출현으로 인류의 역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는 많은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심하면 나라까지 망쳤다. 이런 어두운 현상은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지난 몇년 처참하게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탐관이란 존재와 그 현상은 반드시 근절해야 할 해악이다. 법과 제도를 통한 근절은 물론 그에 앞서 탐관과 그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파악이 있어야만 한다. 이 때 탐관의 역사적 기원이란 문제, 즉 탐관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란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바 있는데 대력 다음 세관점이 있다.
첫째,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한나라 때 시작되었다는 주장으로 명말청초의 학자 고염무(1613~1682)가 대표적이다.
둘째, 약 3천년 넘어 전인 서주 시기(기원전 1046~기원전 771)에 이미 탐오貪汚와 뇌물에 관한 기록이 있다.
‘탐오’란 이익을 탐하고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나 그런 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장자莊子》 <추수秋水> 편과 《회남자淮南子》 <숙진훈 眞訓> 등에 보인다. 이후 ‘탐오’는 직권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재물을 취한다는 뜻의 단어가 되었다.
셋째, 약 3,700년 전인 기원전 17세기 은상殷商 이후 사유재산 제도와 계급국가의 성립됨으로써 ‘탐오’는 통치계급의 직업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어느 주장이든 탐관의 출현은 그 역사가 최소 2천 년은 넘었다. 그런데 역사문헌을 보면 탐관은 대략 원시시대 말기인 요·순 시기에 이미 나타났다. 그렇다면 탐관은 약 5천년 역사를 가진다. 편의상 기원전 8세기 초반(기원전 770년)에 시작되는 춘추시기를 분기점으로 잡으면 그 이전 탐관의 출현은 대략 다음 세 단계를 거쳤다.
요·순 시기에 이미 보인 탐관에 대한 징벌
이 시기 탐관에 대한 징벌의 역사가 있었는가를 밝히려면 다음 세가지를 살펴야 한다. 첫째, 관리가 있었는가? 둘째, 징벌 조항이 있었는가? 셋째, 탐관이 징벌 당한 사실이 있는가?
중국의 노예제 사회의 역사는 기원전 약 21세기에 세워진 하夏 왕조로부터 시작된다. 요·순 시기는 하 왕조가 서기 이전 원시사회 말기다. 당시의 사회조직은 느슨하고 성긴 부락연맹, 즉 원시사회가 와해되어 가는 부계사회 말기이다. 이 시기 생산력은 이미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었고 생산물은 남아돌았다. 따라서 남아도는 잉여 생산물을 차지하는 사유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어 이 사유제를 유지하기 위한 초보적인 국가 기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급적으로는 귀족계층이 연합하여 관리들의 기구인 백관百官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관리는 각 연합부락의 씨족 수령, 즉 방백幇伯, 사장師長, 추장酋長 등이 맡았는데 이를 ‘백성百姓’이라 불렀다. 이때의 백성은 훗날 인민과는 다른 뜻으로 백관을 가리킨다.
동시에 당시 다섯 가지 형벌인 ‘오형五刑’을 제정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당시 공적公的으로 백관을 제약을 가한다는 규정과 기제를 대표한다.
요임금은 순을 선발하여 자신을 보좌하는 대신으로 삼았다. 순은 부락연맹을 다지기 위해 ‘오형’을 수정하고 처벌을 다소 느슨하게 했다.
즉, 사형 대신 추방이나 유배를 보내는 ‘유流’를 채택했다. 동시에 ‘오형’에 ‘관형官刑’을 확정했는데, 바로 이 형벌이 주목된다. ‘관형’이란 관리를 통제하는 형법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형법은 계급대항의 산물로서 일부 사람의 의지를 대표하여 다른 일부 사람을 탄압하는 도구이다. 그 안에는 그 계층 내부에 대한 제약도 포함되어 있다.
요임금 시기 ‘관형’의 확립은 당시 관리에 대한 전문적인 구속성을 가진 규정을 제정한 것을 의미한다. ‘관형’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어떤 처벌을 받았나? 《상서》 <요전>에 따르면 “녹봉을 받는 관리가 잘못하면 채찍이나 매질을 가하는 형벌을 가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시 처벌을 받은 탐관이 있었나? 《좌전》 문공 18년 조에 보면 춘추시대 노나라의 사관 태사太史 극克이 요임금 때 처벌을 받은 탐관들인 ‘사흉四凶’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흉’이란 혼돈, 궁기, 도올, 도철을 말한다. 《사기》 <오제본기>에는 “순이 사방의 문에서 손님을 맞이하면서 네 흉악한 사흉을 저 멀리 사예四裔의 땅으로 내쫓음으로써 이 괴물 같은 자들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을 합쳐 살펴보면 그 주요내용은 요임금 때 법 집행을 맡고 있던 순이 능력 없고 탐욕스러운 이 ‘사흉’을 먼 변방으로 추방하여 병사가 되게 함으로써 요괴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의 출처는 《좌전》이지만 그 내용이 노나라 사관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옛 왕조 법전에도 유지된 탐관 징벌
요임금이 죽은 뒤 순이 임금 자리에 올랐다. 순은 원시 민주회의의 방법으로 22명의 중요한 관리를 선발하여 각 방면의 사무를 나누어 맡겼다.
예컨대, 우禹는 ‘사공司空’으로 선발되어 순임금을 보좌하여 군대와 정치의 큰일을 전면적으로 주관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일은 고요皐陶를 형벌과 소송을 책임지는 법관의 우두머리인 ‘사士’로 임명한 사실이다. 이는 순임금 때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한층 더 분명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순임금 때도 탐관을 처리한 일이 있었다.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 ‘악정樂正’ 기夔의 아들 백봉伯封이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자 사람들은 그를 ‘큰 돼지’라 불렀다. 그러자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우두머리 후예가 그를 처리했다. 이 때문에 기는 후손이 끊어져 제사를 받지 못했다.
순은 우에게 선양했고 우는 하 왕조를 세워 원래 있던 법전을 계승하는 한편 법관 고요에게 법전의 내용을 더욱 충실하게 만들게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우형禹刑》 또는 《하형夏刑》이라 한다. 《상서》 <대전大傳> 편에 보이는 “하형 3천 조”라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법전이었던 것 같다.
하 왕조의 법전에도 탐관을 징벌한다는 원칙이 유지되었다.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 숙향은 하 왕조의 형법을 탐관을 처리하는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좌전》에는 《하서》를 인용한 “어리석음昏, 탐욕墨, 도적賊, 살인殺은 고요 때의 형벌이니 이를 따르기 청합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당시 진나라의 대리사구代理司寇 양설부는 법관의 신분으로 장물贓物을 챙기고 법을 어겼다. 숙향은 《하서》에 근거하여 ‘고요의 형벌’을 제기했다.
숙향은 “탐관을 묵墨이라 한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양설부에세 ‘묵’이란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묵’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었고, 기록상 최초의 탐관오리라 할 수 있는 양설부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다.

《하형》에 보이는 탐관에 대한 징벌 정신이 하나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 하나라 말기 탕왕이 걸桀을 토벌하면서 걸의 죄상을 열거했는데 탐관이 정치를 주물렀다는 항목이 하나 있었다. 《상서》 <탕서湯誓>에는 탕왕은 하걸이 탐관들을 데리고 인민의 힘을 모조리 바닥내고, 국내의 재부를 모조리 약탈했다고 꾸짖은 대목이 있다. 탕왕은 탐관을 반대한다는 기치를 앞
세워 하걸에 반대하는 역량을 연합하고 조직했다.
이는 탐관이 당시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주었는가를 말한다. 이들에 대해 인민은 이를 갈았고, 통치계급 내부는 탕왕으로 대표되는 탐관에 대한 반대 세력들과 걸을 우두머리로 하는 탐관 집단이 충돌했다. 그 결과 하 왕조를 뒤엎고 상 왕조를 세웠다.(계속)
김영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