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의 역설을 증언하는 수많은 선정비의 정체

2015년 6월6일 인터넷언론 <오마이뉴스>는 흥미롭고도 씁쓸한 기사 하나를 보도했다.
경남 함양군이 동학농민운동을 격발시킨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善政碑를 철거하는 대신 ‘철거를 둘러싼 논란과정과 존치결정 사유를 담은 안내판을 설치키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함양군과 관계자들은 선정비 존치 배경에 대해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우리 군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탐관오리 조병갑의 선정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비정신과 구국정신이 강한 함양군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사의 교훈이라는 점에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 비를 보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선정비는 조병갑이 함양군수를 지낸 경력 때문에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조병갑이 함양군수를 지낼 때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또 그렇다면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그 많은 선정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병갑 선정비 논란은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 남아 있는 많은 선정비의 정체와 탐관오리의 역설을 증언하는 의미심장한 유적이자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오죽 했으면 조선시대 관리가 군수나 현령 등으로 부임해오면 그 즉시 선정비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정치를 잘 하든 못 하든, 그가 청백리가 되었건 탐관오리가 되었건 어차피 세울 선정비, 얼른 떠났으면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이는 달리 말해 청백리보다 탐관오리가 훨씬 더 많았음을 역으로 증언하고 있다.
탐관오리 현상은 그 뿌리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춘추시기 처벌 받은 최초의 탐관 양설부
춘추시기(기원전 770~기원전 404)는 위로는 주 왕실로부터 아래로 제후국에 이르기까지 관리들이 정치활동에서 장물이나 뇌물을 탐한 사례가 기록에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좌전》 희공僖公 24년인 기원전 636년 조목에는 적狄의 사람이 매우 탐욕스러웠음에도 주 천자가 도리어 이를 기용했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이 대단했다고도 했다.
제후국에서도 서로 뇌물을 주고받고 장물 따위를 탐하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심지어 최고 권력자인 국군國君조차 탐욕스러운 무리에 합류하여 하고 싶은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국군이 탐욕을 부리다보니 그 아래의 관리들은 더 했다. 진晉나라 국군의 사관 서사筮史는 조曹나라 국군이 뇌물을 받아 챙긴 일을 진나라 국군 앞에서 좋은 말로 변명해 줌으로써 조나라 국군이 자리를 지키고 회맹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
위衛나라 국군 성공成公이 감옥에 갇히자 진나라 국군은 연衍이라는 의관醫官을 보내 위나라 국군을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의관 연은 위나라 영유寧兪의 뇌물을 받고 독약을 적게 써서 위나라 국군이 죽지 않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노나라 희공僖公은 위나라 국군을 위해 주 천자와 진나라 제후에게 아름다운 옥 10쌍을 바쳤다.
천자와 진나라 국군은 뇌물을 받고 위나라 국군을 석방했다. 풀려난 위나라 국군은 사람을 보내 자기 나라의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내가 귀국하여 다시 국군 자리에 복귀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대 두 사람을 경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뇌물을 받은 다음 위나라 국군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살해후 그를 맞아들였다.
전국시대 들어 더 많아진 탐관 사례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2)에 오면 이런 탐관의 사례는 더 많아졌다. 춘추전국 시기의 이런 사례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저 유명한 ‘가도벌괵假道伐虢’의 고사에 나온 우虞나라의 국군이다. 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길을 빌려준 우나라는 괵을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망했다. 뇌물 때문에 나라를 망친 경우였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춘추전국 시기 정치무대에서 뇌물은 공공연히 벌어졌고, 탐관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인민들은 자신들의 심경을 《시경》에 노래로 남겨 꾸짖었다. 다음이 대표적이다.
“탐관의 나쁜 짓거리를 보고도 공손하게 대하면 대꾸하지만 비판하면 술에 취한 듯 못 본체 한다네.”
계급이 엄격하고 노예주 계급의 잔혹한 압박이 일상이었던 춘추시기 탐관에 대한 인민들의 이런 비판이 통치계급이 편찬한 《시경》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 상황은 남아 있는 이런 비판보다 백배, 천배는 더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탐관이 얼마나 준동했으며, 또 그 피해가 얼마나 엄중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춘추시기 이런 폐해에 대한 각국의 징벌적 조치는 비교적 강력했다. 그 중에서도 진나라 평공平公 시기의 고급 관리이자 사법을 책임지고 있던 양설부가 뇌물을 탐하다가 죽은 다음 그 시신을 조리돌리는 혹형을 받은 일은 탐관에 대한 강력한 처벌의 대표적 사례로 전한다.
그 당시를 전후로 많은 탐관들이 나타났고, 그들을 처벌하는 법령도 점점 선명해져 처벌을 받은 탐관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양설부는 ‘묵형墨刑’이라는 명문에 기록된 법으로 처벌 받은 최초의 사례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양설부는 법률로 판정을 받은 최초의 탐관이었다.
이상 정리한 ‘탐관의 출현과 그 역사’의 내용을 요약해본다. 먼저 중국 고대 초기 탐관의 출현과 그 움직임의 단서는 대체로 이렇게 서술할 수 있다.
원시사회 말기 사회적으로 잉여 생산물과 사유제가 나타나면서 씨족부락의 귀족신분 관리가 잉여 생산물을 침탈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부계사회 말기인 요·순 시기에 오면 탐욕에 대한 징벌의 정신을 반영한 《요전》이 나왔다.

관료제 확립되며 심각하게 증가한 탐관
우가 세운 하 왕조 시기에는 중국사가 노예제의 문턱을 넘어 관료제가 점차 확립되고 전문 법관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재물을 탐하고 긁어모으는 현상도 이전보다 증가하고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관리를 단속하는 ‘관형官刑’이라는 조례가 탄생했다.
은상 왕조의 탕 임금 때에도 탐관은 하나라 말기를 이어 계속해서 생겨났다. 상탕은 《관형》을 제정하여 관리들에게 경고하고, 관리들을 제약하고 탐관을 공격했다. 은상 시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用人 제도에 탐관을 반대한다는 명확한 원칙이 세워져 재물을 탐하는 자는 관리로 임용하지 않았다.
주 왕조는 목왕 때 《여형》을 제정하고 ‘오자법’을 공표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탐관에 대한 최초의 징벌법이었다. 이는 국가기구의 초기 형식, 즉 법률의 형식으로 탐관을 징벌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주 왕조 시기의 탐관들이 정치활동에서 비교적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탐관은 춘추시기에 더욱 창궐했고, 탐욕으로 법을 어기면 ‘묵墨’이라는 죄목으로 탐관을 처벌했다는 역사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로도 탐관과 그 추악한 행위는 역사 기록에 끊이지 않고 수록되었다.
이제 역사에 오점을 남긴 탐관오리들의 구체적인 행적을 시대 순으로 살피는 본격적인 대장정에 나선다.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지지만 이들의 추악하고 사악한 행적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공직자들이 자신의 공직생활을 돌아보길 희망해본다. 나아가 사회에 청렴의 풍조가 널리 퍼져 나가길 기대해본다.
김영수 교수
(사)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