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 양설부, 명문가 집안 서자 출신이라는 정신 콤플렉스
탐관 양설부, 명문가 집안 서자 출신이라는 정신 콤플렉스
  • 영광21
  • 승인 2025.03.0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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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참시 당한 최초의 탐관오리 양설부 ①

■ 김영수의 ‘Back to the Future’ 탐관오리 열전 ⑤

 

춘추시대 지도와 진나라의 위치

 

양설부는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탐관오리이자 훗날 하나의 역사현상으로서 탐관오리에게 나타나는 여러 특징을 한 몸에 갖춘 자였다. 양설부는 또 역대 간신의 역사와 현상에서 가장 공통적이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탐관형貪官形’ 간신이기도 했다. 사실 간신과 탐관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언급했듯이 모든 탐관이 100% 간신은 아니지만 모든 간신은 100% 탐관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간신과 탐관의 역사를 종합해보면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탐일무四貪一無’로 정의할 수 있다. ‘사탐’이란 탐욕이라는 본성을 바탕으로 권력을 탐하는 탐권貪權, 자리를 탐하는 탐위貪位, 재물을 탐하는 탐재貪財, 여색을 탐하는 탐색貪色이 그것이다. ‘일무’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치無恥’다.
기록상 양설부는 이 ‘사탐일무’의 대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탐관오리로서 그의 행적, 즉 탐행貪行을 통해 이 점을 확인해보자.(양설부의 행적은《좌전》의 노나라 성공成公, 양공襄公, 소공昭公 때의 기록에 흩어져 있는데, 그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않았다. 

 

출신의 콤플렉스, 성격 형성에 영향  
양설부는 춘추시대인 기원전 6세기 서북방 진晉나라 평공(平公, 재위 기원전 557~기원전 532)과 소공(昭公, 재위 기원전 531~기원전 526) 때의 인물이다. 약 100년전 진나라를 패주국으로 끌어 올렸던 문공(文公, 기원전 약 697~기원전 628) 시기의 명장이었던 양설투극羊舌斗克의 후손으로, 말하자면 명문가 출신이었다. 다만 양설부는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이었고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양설부의 아버지 양설직이 본처(이름 미상)의 노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본처는 남편이 노복에게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노복을 단속해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 식구들이 그렇게까지 할 것 있냐고 하자 본처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산과 깊은 연못은 용과 뱀이 사는 곳이다. 그 여자가 예쁘긴 하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나는 그녀가 용이나 뱀을 길러 너희들을 해치고 가족에게 해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이다. 이 정도 일이 내게 무슨 방해가 되겠느냐!”
그럼에도 본처는 어쩔 수 없이 남편과 노복의 동침을 허락했고 노복은 양설호에 이어 이 글의 주인공인 양설부를 낳았다.
이렇게 양설부는 진나라 명문가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런 그의 출신 배경은 귀족 집안의 자제가 흔히 가지는 교만한 기질의 형성과 함께 서자 출신이라는 정신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권세와 부귀 그리고 서자라는 이 복합적인 환경에서 양설부는 성장했고 이는 훗날 그의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격을 형성하는데 나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양설부의 흥성과 시련의 시기
양설부의 친형인 양설호는 기록만 놓고 볼 때는 양설부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양설호는 준수한 외모와 남다른 용기로 당시 진나라의 실세인 육경六卿의 한 사람이었던 난영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이로써 양설 집안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기원전 552년, 진나라는 단연(지금의 하남성 복양시)에서 13개 제후국들과 회맹을 가졌다. 당시 주자邾子라는 작은 나라가 노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노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노나라를 도와 주자국에 대한 토벌에 나섰고 그 군대를 양설부가 이끌게 되었다. 
양설부는 주자국을 정복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노나라 실권자 계무자는 양설부에게 크게 감격했다. 양설부의 위세가 한껏 올라갔다.
그런데 이듬해인 기원전 551년, 뜻하지 않게 진나라에 내란이 터졌다. 문제는 양설 집안의 후견자와 같은 난영이 축출당한 일이었다. 난영은 초나라로 망명했다. 실권자 범선자는 난영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한편 난영의 측근 10명을 죽였다. 이 10명 중에 양설부의 친형인 양설호가 포함되었고 양설 집안사람들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양설부가 아직 귀국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양설부는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봐 아예 노나라에 몸을 맡겼다. 얼마 전 은혜를 입은 노나라 계무자는 양설부를 보호했다. 
얼마 뒤 양설부를 포함한 양설 집안사람들이 사면을 받았지만 과거처럼 중책을 맡지는 못했다. 이로부터 양설부는 20년 넘게 시련의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바뀐 정국   
난영 축출 사건으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기원전 532년, 진 평공이 죽고 이듬해 소공이 즉위하면서 정국이 적지 않은 변화를 맞이했다. 한선자가 집권하면서 양설 집안사람들이 다시 중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양설부도 군대 일을 맡게 되었다.
기원전 529년 한선자는 진나라의 패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제후들과 평구(지금의 하남성 봉구현 동쪽)에서 회맹을 주도했다. 이 때 양설부는 군인과 전투마를 포함한 무려 30만 대군을 훈련시키며 그 위세를 과시했다. 병권을 쥔 양설부는 의기양양했고 드디어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탐욕과 간성奸性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대를 이끌고 제후국들에게 위세를 과시하던 양설부는 약소국 위衛나라를 지나면서 공개적으로 재물을 요구했다. 위나라가 이를 거절하자 양설부는 군마를 먹인다는 핑계로 군사를 풀어 풀과 나무를 베는 등 소란을 떨었다. 
위나라는 사신에게 맛난 음식과 질 좋은 비단을 가지고 양설부의 배다른 형인 양설힐에게 보내 도움을 청했다. 양설부의 탐욕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양설힐은 위나라 국군의 명의로 비단을 양설부에게 갖다 주라고 권했다.
위나라 사신은 양설힐의 말대로 비단을 양설부에게 갖다 바쳤고 양설부는 바로 예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사신이 떠나기도 전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당시 비단은 대단히 비싼 물품이었고 양설부는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재물을 긁어냈다. 탐욕스러운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진 평공은 남방의 강국 초나라와 싸워 승리하는 등 문공 때 이룩했던 패업을 회복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집권 후기에는 무리한 토목사업 등으로 권력이 여섯 집안인 6경에게 넘어가는 등 난맥상을 보였다. 사진은 진 평공과 그 당시 악사樂師로서 직언을 잘 했던 사광의 모습이다.

 

본격화된 양설부의 탐행
재물에 맛을 들인 양설부는 가는 곳마다 소동을 떨며 제후국들에게 뇌물을 강요했다. 양설부의 탐욕을 헤아린 제후국들은 뇌물 공세로 양설부의 만행을 피했다. 양설부는 10여개 제후국을 굴복시키고 뇌물을 챙겼다. 기원전 529년 당시 진나라가 주도한 평구平丘 회맹에 정작 참석해야 할 노나라가 오지 않았다. 
진 소공과 한선자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이를 눈치 챈 양설부는 제멋대로 노나라 상경上卿 계평자를 체포했다. 노나라는 양설부의 탐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단과 먹을 것 등 후한 예물을 보냈다. 양설부는 아랫사람에게 이를 받게 했지만 계평자는 풀어주지 않았다. 
계평자는 과거 내란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신세였던 양설부를 지켜준 계무자의 손자다. 
이런 계평자를 억류했으니 이는 말 그대로 배은망덕이었다. 양설부는 한술 더 떠 계평자를 진나라로 압송해갔다. 노나라 국군이 직접 계평자의 석방을 요청하기 위해 진나라의 국경인 황하까지 왔지만 입국을 거절당했다. 


이 무렵 진나라와 초나라의 갈등이 격화되어 쌍방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우방인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없애며 진나라를 압박해왔다. 진나라로서는 동방의 우방 노나라의 도움이 급했다. 그런데 노나라의 귀족 계평자를 억류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계평자는 귀국을 거부하며 자신의 억류는 노나라를 모욕한 것이니 진나라에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난감해진 한선자는 진나라 조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숙향에게 자문을 구했다. 숙향은 양설부에게 결자해지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한선자의 명령을 받은 양설부는 난감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간사한 양설부의 솜씨가 발휘됐다. 그는 계평자를 찾아가 과거 자신이 계무자에게 입은 은혜를 거론하며 그 때문에 자신은 두번째 생명을 얻었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계평자는 가증스러운 양설부의 위장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를 믿었다. 양설부는 이 뿐만 아니라 돌아가지 않을 경우 진나라는 계평자를 황량한 황하 주변에 평생 억류시키려 한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계평자를 얼렀다. 
계평자는 교활한 양설부에게 농락당해 두려움에 떨면서 노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한 양설부는 의기양양 한선자에게 자신의 공을 떠벌였고, 한선자는 그를 진나라 사법을 총책임진 대리사구代理司寇에 임명했다. 양설부라는 늑대가 날개를 다는 순간이었다.

 

김영수 교수
(사)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