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의 ‘지금, 여기, 우리’를 기록하다 / 영광 아카이빙 기록집 <아름다운 백년동행(in 영광)>

“동짓달에 시집왔는디, 그때 상각(상객)으로는 아부지하고, 큰집 큰 당숙이 함께 왔지. 농(반다지)도 하나 사서 짊어지고 오고, 그때 친정집이 가난허디 가난허게 살았어도 큰딸을 시집 보내는디 보기 싫게는 안 헌다고 빚 얻어서 농을 해줬었어. 친정 동네서 가마를 타고 염산 한재를 넘어서 인수정 앞을 지나고, 백수 가지매 앞에 온게 ‘어디로 가냐’고 그곳 사람들이 묻더만. 버젓이 원삼 족두리를 입었은게. 새각시가…. 가마가 훤했제. 긍게 ‘저로코롬 이쁜 각시가 험한 산골로 시집을 가는 중인가 비다’고 안씨라워(측은해) 하드만.”
“맞선은 봤나요?”
“아니여. 맞선은 안 봤어. 신랑쪽 어른이 친정 우리집에 와서 나만 선보였고, 신랑은 우리 아부지가 그집 가서 보고 왔제.” - 이양임(백수읍) 어르신 인터뷰 내용 중 -


여기 영광사람(영광인靈光人)이 있고 삶의 터전 영광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 등 시대의 아픔을 안은 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을 거쳐 노후를 맞이한 100년, 한세기를 맞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기록물로 탄생했다.
제2기 영광기록인 아카이빙 기록집 <아름다운 백년동행(in 영광)>이 지난 1월 발간됐다. 기록집 전체적으로는 3번째다.
영광군은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시대 흐름을 반영해 영광지역의 현재와 기억을 기록하는 인적자원 양성을 위해 지난 2022년에 영광군민 기록활동가(영광기록인人) 교육을 시작해 23년까지 2기 교육생을 배출했다.
<아름다운 백년동행(in 영광)>은 이렇게 양성된 제2기 영광기록인들이 우리지역에 사는 100세 이상 어르신(24년 기준)들을 대상으로 2년(23~24년) 간 직접 인터뷰를 통해 생애를 구술한 기록집이다.
여기에는 총 11분의 어르신들이 구술에 참여했다. 가장 연장자는 1918년생 어르신이었다. 그러나 참여한 어르신들이 고령인 이유로 기록집이 세상에 빛을 보기 전 네분이 세상과 이별하는 안타까운 아픔이 있었다.
기록집을 보면 우리네 부모님, 할머님과 할아버님 세대들이 직접 경험한 일들이 생생하다. 중년 세대들까지는 흔한 이야기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째서 엄마 이름이 길례(어린시절 이름)냐고?!”
“느그 외할매는 한시랭이서 살고 외갓집은 법성서 살으셔. 그런디 법성 외갓집으로 나를 나러(낳으러) 가다가 길에서 막 삐대다가 낳았단다(흐흐흐). 그래서 엄마 이름이 길례여. 길에서 낳았다고 길례.
그때는 애기들 이름이 공달에 낳았다고 공례라고도 짓고 막 그러던 시상이여. 우리 외갓집 동네는 봄이 되믄 흐건꽃(벚꽃)들이 막 피어나고, 큰 굿들도 허고, 사람들이 막 몰려와서 구경을 허느라고 야단들이었제.” - 박순례(백수읍) 어르신 구술 중 -
6·25전쟁 후 완전 분단된 한민족이 해방 직후만 해도 남북 왕래가 자유스러웠다면 요즘 세대는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육지를 통해 왕래도 가능하지만 배나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일본과 중국보다도 더 멀게 느껴지는 이북과는 어땠을까?
“내가 16살부터 19살까지 (서울 용산의)체신학교에 다녔어요. 원래는 체신위원양성소라고 했는데 체신학교로 됐어요. 거기 나오면 우체국 근무해요. 거기 나오면 전국의 각 우체국으로 갑니다. 그때는 어~ 남북이. 어~ 저 이북 평양서도 오고, 함흥서도 오고, 영광서도 가고, 전국에서 잘하는 놈들만 와요. 다 1, 2번 하는 놈들만 와요. 전국에 체신학교가 하나밖에 없는디 경쟁이 심할 거 아니요.” - 박종수(홍농읍) 어르신 구술 중 -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대가 시대인지라 오랜 세월 동안 호적이 없어 보통의 사람들이 누리는 혜택을 보지 못한 서글픈 사연도 있었다.
은행에 본인 명의의 통장을 개설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 누리는 의료보험 혜택이나 나이가 들면 누구나 받는 연금 혜택도 받지 못하다 15년여전 며느리가 호적을 만들어준 사례도 눈에 띈다.
“이 양반(어머니)이 혼자 그렇게 살으시다가 부모님들이 주민등록 저기를 안 했나봐. 출생신고를. (기억에 오류가 있는 듯)출생신고를 하기는 했어도. 인자 그 결혼 하셔갖고 그 남편이 사망신고를 해부렀나봐.
호적 만든지가 얼마 안되요. 얼마나 힘들게 힘들게 작은 며느리가 그렇게 다니면서, 갓난애기 업고 다니면서 그렇게(호적을 만들었나) 했나봐요.” - 박소례(대마면) 어르신 딸 주선님님 구술 중 -
기록집에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어르신의 생생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한 기록인의 표현대로 어르신의 생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어 이야기의 여운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오랫동안 남을 것으로 보여진다.
9살이 되던 해, 일본에서 터전을 마련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엄마와 동생과 함께 일본에 간 김학래 어르신. 그곳에서 일제 강제노역을 피하기 위해 15살(1938년)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던 45년 8월 6일 아침 여느 때처럼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 듣도 보도 못한 천둥소리와 불꽃, 회오리 바람이 사방을 휩쓸었다.
“히로시마 요꼬가와 역이 있어. 히로시마에 기차역이 세 간데 있어. 동쪽에가 있고, 서쪽에가 있고. 고이엔끼라고 또 세 간데 마지막 있어. 우리는 요꼬가와 역에가 살았어. 일본집은 전부 나무집이라. 인자 원폭에 그냥 팍 주저앉을 때 번갯불 만치로 (두손으로)번쩍하길래 얼른 이러구(보듬어 안아주는 듯이). 아기들은 마치 그때 밥을 줬어. 8시 되었응게. 8시 넘었은게 밥을 줬어. (중략)애기들은 더듬어 본게 어디 치이든 안했더라고. 애기들은 놀래갖고. 아이고, 어쩌꺼나. 그 속에서 한 이십분 간이나 막 그런 것 같아. 막 ‘다스끼께, 다스끼께’ 막 그소리가 ‘살려달라’고 그 말이거든. 일본말로. 막 ‘다스끼께, 다스끼께’ 소리하다가 지쳐갖고는. (중략)아이고, 인자 여기서 타서 죽을랑 갑다. 애기들하고 타서 죽을랑 갑다.(후략)” - 김학락(법성면) 어르신 구술 중 -
원폭 피해로 어느 것 하나 남은 게 없던 어르신은 부모님과 귀국하기로 하고 남편의 매형이 거주하던 당시 홍농읍에 거주할 집을 부탁해 영광에 정착하게 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조국에서의 삶마저도 순탄하지 않았던 생활이 기록집에 구술돼 있다.
한편, 영광기록인들은 이미 2022년도에 수료한 제1기부터 아카이빙 활동을 시작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의미가 있는 마을 고목(관내 보호수와 천연기념물 제외)들 16건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다룬 <영광의 고목을 기록화하다> 기록집과 전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영광지역 그룹홈 8곳의 일상생활사를 다룬 <영광군 그룹홈을 기록화다> 기록집을 연이어 발간했다.
주민들의 생활사와 다양한 주제를 발굴해 구체화시킨 기록활동가 사업은 시책 일몰제에 따라 올해부터 사라졌다. 비록 기록활동가 양성사업을 담당하는 기록연구사 인력 부족과 행정업무 공백으로 인해 일몰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성과는 컸던 사업으로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아카이빙(Archiving)의 사전적 의미는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특정자료를 잘 정리해서 보관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문서나 파일뿐 아니라 SNS게시물, 사진, 동영상까지도 아카이빙의 대상이 된다.
영광기록인 기록집은 영광군 대표 누리집(열린군정→미디어영광→영광 아카이빙 기록집)에 게시됐다. 관심 있는 주민들의 애독을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