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의 사법권을 손에 넣은 양설부의 간행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권력과 법을 한껏 악용해 파리와 구더기가 오물을 찾듯 재물에 대해 끝없는 탐욕을 드러냈다.
그 무렵 한선자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토지소송 사건을 양설부에게 처리하게 했다. 많은 땅이 걸려 있는 이 사건은 양설부의 탐욕을 더욱 부추겼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양설부의 수명을 단축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당시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하희夏姬의 성추문이 터졌다. 그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미모와 남다른 수완으로 ‘살삼부일군일자殺三夫一君一子, 망일국양경亡一國兩卿’하는 놀라운 성과(?)를 남겼다. 그녀는 “남편 셋, 임금 하나, 자식 하나를 죽이고 한 나라와 두 명의 경(귀족)을 망하게 하며” 국제적으로 큰 악명을 떨쳤다.
극성스러운 탐행과 최후
이 하희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그녀를 마지막으로 차지한 인물은 초나라 귀족 신공申公 무신巫臣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초나라에 살지 못하고 진나라로 망명했고 그 두아들 형후와 옹자 등도 함께 망명했다. 옹자는 진나라에 건너와 조국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패전상황을 역전시키는 등 전공을 세워 많은 땅을 받았다.
그런데 형후와 옹자는 초나라에 있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진나라에 망명해서도 서로 싸우다 결국 땅을 놓고 소송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양설부가 이 두형제의 소송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형 옹자는 양설부의 성격을 파악해 잽싸게 딸과 뇌물을 바치며 결탁했다. 양설부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옹자 편을 들었다.
허망하게 땅을 빼앗긴 형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해 동생 옹자를 죽이고 내친 김에 양설부까지 죽여 버렸다. 탐욕의 화신 간신 양설부는 이렇게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양설부의 최후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양설부가 죽자 그 때까지 그가 저지른 간행이 속속 드러났다. 이로써 사건이 더 복잡해졌다. 한선자는 양설부의 형 양설힐을 불러 어떻게 사건을 처리했으면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양설힐은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세사람은 모두 당연히 죽을죄에 해당합니다. 형을 죽인 형후는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두 사람은 그 시신을 다시 잘라 저자거리에 내걸어야 합니다.”
한선자가 의아해 하며 그 까닭을 묻자 양설힐은 이렇게 답했다.
“옹자는 자신이 남의 땅을 빼앗고도 뇌물이란 방법으로 정직함을 팔았습니다. 양설부는 법을 팔아 사익을 취했고 형후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이들의 범죄 정도는 모두 엄중합니다.”


끝나지 않은 탐관의 최후
양설힐은 하 왕조의 법관 고요皐陶가 제정한 형전을 끌어다 “자신의 악행을 미화하는 것을 ‘혼昏’, 탐욕으로 공직을 그르치는 것을 ‘묵墨’,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합니다. 고요의 형벌을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한선자는 양설힐의 말에 따랐다. 이렇게 해서 양설부와 옹자의 시신은 토막이 나서 저자거리에 전시되었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본격적인 탐관형 간신 양설부는 이렇게 죽어 시신이 토막 나고 나아가 저자거리에 내걸리는 치욕스러운 두번의 최후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시신을 파헤쳐 토막을 내어 백성들에게 전시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다름 아닌 형 양설힐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기록은 이런 양설부의 간행을 ‘탐묵貪墨’이란 두 글자로 평가했다. ‘탐묵’이란 훗날 탐관에 대한 형벌의 하나이자 탐관오리를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되었다. 최초의 탐관형 간신 양설부가 이 죄목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탐관에 대한 평가와 분석
훗날 공자는 이 사건을 두고 한선자의 일처리를 칭찬하는 한편 “양설부는 ‘뇌물이면 뇌물’, ‘속임수면 속임수’, ‘탐욕이면 탐욕’, 이 삼악三惡을 한 몸에 지닌 자로 죽음으로도 모자란다”고 평가했다.
공자의 이 평가는 탐관형 간신 양설부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평가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하나의 역사적 존재이자 역사현상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자면 부족한 점이 적지 않은 평가이다.
이런 점에서 양설부의 간행이 보여준 특성을 좀 더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간신의 출신과 성장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그림자이고 미래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그 과거는 대체로 출신과 성장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막강한 양설부의 집안 배경과 서자 출신에서 오는 콤플렉스는 그의 탐욕과 간성奸性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양설부의 행적에서 보이는 특징은 역사상 간신이 보였던 보편적 특성과 많이 겹친다.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먼저 공자가 지적한 ‘삼악’, 즉 뇌물과 속임수 그리고 탐욕이 있다. 다음으로 출신과 성장과정의 콤플렉스로 형성된 삐뚤어진 성격이다.
그리고 이 성격 중 가장 중대한 것이 탐욕이었고 이는 양설부를 탐관형 간신으로 규정한 가장 큰 요인이다. 다음으로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심기를 헤아려 비위 맞추는 약삭빠른 요령, 양설부의 이런 간성과 권력이 만나 드러난 자기 과시를 들 수 있다.
권력을 가지면 나타나는 간성은 …
이밖에 양설부의 간성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노나라 권력자 계평자를 체포하고 억류한 배은망덕, 계평자를 회유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위선과 위장僞裝 등도 탐관오리 유형의 간신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들에 속한다.
요컨대 양설부는 권력을 가지면 함께 나타나는 여러 간성들을 한 몸에 장착한 탐관형 간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후대에 나타난 전형적인 간신의 특성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양설부의 최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초의 탐관형 간신으로서 그는 자신의 권력과 권력자의 총애만 믿고 무모하고 무리하게 법을 집행하다 죽임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 그 시신이 잘리고 저자거리에 내걸리는 더할 수 없는 치욕까지 당했다. 그것도 배다른 형제이긴 했지만 형의 강력한 제안의 결과였다.

공자의 평가를 비롯한 역사적 평가도 당연히 신랄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공소시효 없는 역사법정의 기둥에 못 박힌 최초의 탐관오리이자 간신이기도 했다. 역사의 경고와 경계가 이처럼 냉혹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영수 교수
(사)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