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과 미녀가 연출한 망국의 원흉 탐관오리 백비 ①
기원전 770부터 기원전 403년까지를 역사에서는 동주 또는 춘추시대라 부른다. 대략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시작한 춘추 후기는 흔히 ‘오월춘추吳越春秋’로도 불린다.
강남 동남부에 위치했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패권 경쟁이 한 시대를 드라마틱하게 수놓았기 때문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시대는 수많은 영웅과 군사가 그리고 다양한 모략가들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뽐냈다. 복수의 화신 풍운아 오자서伍子胥, 명예롭고 지혜로운 은퇴의 상징 범려范蠡, 병가의 성인으로 불리는 손무孫武(손자), 오·월의 최고 통치자들이었던 합려闔閭·부차夫差·구천勾踐, 비운의 미녀 서시西施. 이들의 개성 넘치는 활동으로 오월춘추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이면서 흥미로운 시대로 남아 있다.
오월춘추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약 반세기에 걸친 드라마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월나라는 한때 오나라에 의해 거의 망국의 지경에까지 몰렸으나 ‘와신상담’ 끝에 상황을 역전시키고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오나라는 풍운아 오자서와 손자 등 많은 인재들을 기용하여 한때 춘추시대 패주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그 명예를 유지하지 못한 채 씁쓸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런데 오나라의 어이없는 멸망에 탐관오리 하나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오월춘추의 또 다른 축을 구성하고 있는 이 탐관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재물과 여색을 끔찍이도 밝혔던 역대 탐관이자 간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남기고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초나라 명문가 출신인 오자서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오나라 대부로 출세의 길을 걸었으나 끝내는 오자서를 모함하여 해쳤고, 오나라조차 망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백비라는 이름을 가진 망국의 탐관오리였다.
이제 한 나라의 멸망은 물론 국제정세의 변화까지 초래한 이 탐관오리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를 통해 역사의 침통한 교훈을 얻어 보고자 한다.(백비의 행적은 《사기》 <오자서열전>, <오택백세가>, <월왕구천세가>; 《좌전》; 《오월춘추》; 《회남자》; 《국어》 등에 남아서 전한다.)

백비의 내력과 망명
백비(?~기원전 473)는 장강 남쪽의 강대국 초나라 출신이다.
초나라는 춘추시대에 북방 중원의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제후국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온 강국이었다.
백비는 초나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백주리伯州犁(?~기원전 541)는 원래 중원의 강국 진晉나라 사람이었지만 초나라에서 관직을 받았고 아버지 백극완伯郤宛(?~기원전 515)은 대부를 지냈다. 말하자면 백비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특히 아버지 백극완은 강직하면서 온화한 성품으로 나라사람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백비는 아무리 좋은 집안, 훌륭한 부모 밑에서도 탐관오리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백비는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모함으로 아버지 백극완과 가족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초나라의 극한 정쟁 상황에서 간신히 오나라로 도망쳤다. 그는 사방을 떠돌다 오자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백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무극의 모함으로 아버지와 형님을 잃은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그 희망은 희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백비를 만난 오자서는 동병상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백비를 오왕 합려에게 추천했다.
오자서와 백비는 개인적 친분이나 공적인 관계도 전혀 없는 사이였다. 그저 두 사람 모두 초나라 출신에다 비무극이라는 공동의 원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당한 비극적 상황은 다른 모든 조건과 관계를 뛰어넘어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들었다. 여기에 자신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오자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던 오왕 합려가 있었기 때문에 백비가 오나라에 정착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복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오자서는 같은 원수를 가진 백비에 대해 강한 동정심과 함께 타국인 오나라에서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백비가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것이 오자서가 가진 기본 정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자서의 이런 순수한(?) 인정이 훗날 전개될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오자서도, 백비도, 합려도….
인간은 그 자체로 늘 진화하는 동물이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 되었건 나쁜 방향이 되었건 말이다. 탐관도 간신도 끝없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자서의 추천을 받은 합려는 백비의 불행을 가엾이 여겨 그를 대부로 삼아 오자서와 함께 국정을 보좌하게 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망명객의 신세로 별다른 재능도 지략도 없고 지금까지 어떤 공적을 남긴 적 없는 백비가 오나라에서 벼슬을 받고 오왕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자서 덕분이었다.
오자서는 오도 갈 데 없는 백비를 위기에서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서방의 강국 진秦과의 전투에서 패한 백비의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당시 대장 손무는 무모하게 공만 세우려다 1만 군사를 잃은 백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며 군법에 따라 목을 베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이런 자를 살려 두었다가는 장차 오나라에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는 비교적 정확한 진단도 내놓았다.

오자서의 1차 실책(?)
그런데 이때 오자서가 다시 나서 군사를 잃은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전에 세운 공적도 있고 또 적을 앞두고 작은 잘못 때문에 장수를 잃는 것은 오히려 손실이라며 손무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합려에게 가서 백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했다.
합려 역시 당초 손무와 오자서의 견해를 따르지 않은 잘못도 있고 해서 백비를 처벌하지 않고 유야무야 사태를 수습하고 말았다.
오자서가 같은 나라 출신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오도 갈 데 없는 백비를 거두어들이고 합려에게 추천한 것까지는 인정상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백비를 지켜보았을 테고 또 대장 손무의 냉철한 분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자서가 백비를 옹호한 것은 분명 사소한 실수로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요컨대 오자서는 간신 백비를 제거할, 아니 적어도 권력의 핵심에서 멀리 밀어낼 수 있는 첫번째 기회를 하릴없이 날려버린 셈이다. 어쩌면 오자서가 이때까지도 백비의 본색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역대 탐관들의 공통된 특기 가운데 하나가 기가 막힌 ‘위장술’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