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세력 억제 위해 등용했던 혹리 시간 흐르며 탐관오리로 전락
지주세력 억제 위해 등용했던 혹리 시간 흐르며 탐관오리로 전락
  • 영광21
  • 승인 2025.06.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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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수 교수의 ‘Back to the Future’ 탐관오리 열전 ⑪

포악하고 가혹한 법집행으로 사욕을 채운 탐관오리 왕온서 ①

탐관오리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방법과 수단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간교하고 은밀하게 정치를 농단하고 재물을 갈취하는 것은 기본이고 필요하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한다. 
포악한 법집행으로 백성을 겁먹게 만든 다음 마음 놓고 탐행을 저지른다. 작은 일도 크게 키우고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가혹하게 처리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이런 권위는 진정한 권위가 아님은 물론이다. 포악함과 가혹함을 앞세운 살벌한 통치로 사욕을 한껏 채운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나라 때의 왕온서(생졸 미상)가 있었다. 
기원전 202년 서한 왕조가 들어선 이후 약 70년에 걸친 회복과 발전을 거쳐 무제武帝 통치기(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에 이르면 정치와 경제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탐욕스러운 지주계급도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막강한 종족세력에 기대고 관부 및 귀족들과 결탁한 다음 힘과 불법을 총동원해 농민들의 토지를 대량으로 빼앗았다.
무제는 이들 지주세력을 막기 위해 혹리酷吏들을 대거 기용했다. 혹리들은 황제의 권력을 뒷배로 삼아 잔혹한 살육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들의 활동은 강력한 지주세력의 발호를 억제하고 전제 황제권을 강화하는데 뚜렷한 작용을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들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무엇보다 이들이 청백리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몇몇 혹리들은 가혹하기는 했지만 누구보다 청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 대부분 탐관오리의 길을 걸었다. 

 

권력자의 지나친 권력욕과 명예욕은 무리한 정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잔혹하고 탐욕에 찌든 탐관오리의 출현은 필연이다. 무제는 이런 현상을 초래한 권력자의 전형이었다.

 

 

지방의 말단관리로 벼슬 시작한 왕온천
이들은 가혹하게 탐행을 저지르고 가혹함으로 탐욕을 감추었다. 이는 자신의 부정축재의 주요한 방식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 시기 탐관오리들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강력한 지주세력에게 도리어 반격을 당했고 이에 맞선 혹리형 탐관오리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이런 현상을 무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이 시기 혹리형 탐관오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왕온서란 인물의 행적을 살펴보도록 하자.(왕온서의 행적은 [사기] 권122 <혹리열전>의 ‘왕온서’ 부분과 [한서] 권90 <혹리열전> ‘왕온서전’에 잘 남아 있고, 무제 당시 혹리들에 대해서는 [사기] 권122 <혹리열전>이 주요 기록이다.)
왕온서는 양릉(지금의 함양시 동쪽) 출신이다. 젊어서는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왕온서는 늘 깜깜한 밤에 철퇴 따위로 사람을 죽이고 파묻었다. 살인으로 돈을 갈취하는 강도짓은 그의 성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포악한 정치의 밑천이 되었다. 
그뒤 왕온서는 지방에서 정장亭長이란 말단 벼슬을 얻었다. 정장은 향촌 기층의 관리로 10리마다 지은 정亭 하나를 관리하는 자리다. 주로 치안과 민간의 소소한 일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바로 파직됐다. 
그 후 왕온서는 현의 관아에서 작은 자리로 시작해서 정위사廷尉史까지 승진했다. 정위사는 사법부의 우두머리인 정위를 도와 조정에 직속된 감옥에서 범죄를 처리하는 자리였다.

탐관들의 탐행에 날개 달아준 황제
머지않아 왕온서는 다시 당시 혹리로 유명한 실세 장탕張湯(?~기원전 115)에게 몸을 맡겼다. 장탕은 왕온서를 어사로 기용하여 도적을 감찰하는 일을 맡겼다. 어사로 부임한 왕온서는 많은 범죄자를 죽이거나 해쳤고 이로써 그의 포악한 성격은 또 한 번 크게 발전했다.
왕온서를 비롯한 가혹한 탐관들의 탐행에 더 큰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은 황제 무제였다. 무제는 전제주의 중앙집권을 전면 강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무제의 이런 통치행위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행위나 사람은 혹독한 타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벌과 살인으로 위세를 부리는 자들이 비교적 빠르게 발탁되고 승진했다. 왕온서도 광평군廣平郡(지금의 하북성 곡주현 북쪽) 도위都尉로 고속 승진했다. 도위는 군수를 보좌하여 군 전체의 군사와 치안을 책임지는 주요한 장관 자리였다.
왕온서는 광평군의 치안을 위해 군에서 사납고 거침없는 10여명의 무뢰배를 꼼꼼하게 선발하여 자신의 손발로 삼아 군내의 도적을 잡는 일에 투입했다. 왕온서가 이들을 중용한 까닭은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온서는 이들이 과거 중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또 발각되지 않고 여전히 치외법권 지대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왕온서는 이 정보를 가지고 저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이 도적들을 잡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키면 이전에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 따지지 않고 처벌하지 않았다. 
반면 도적들을 잡는데 힘을 다하지 않거나 일부러 이 일을 기피하여 도적을 비호하면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는 것은 물론 심하면 가족들까지 죽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이들이 어찌 죽을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왕온서는 또 이들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잔인한 수단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광평군에 인접한 제·조 교외의 도적들이 감히 광평군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광평군은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다’는 ‘도불습유道不拾遺’의 명성(?)을 얻었다.

장탕은 혹리와 탐관을 한 몸에 지닌 잔혹한 탐관오리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직전의 혹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사진은 서안시 장안구에서 발견 발굴된 그의 무덤이다.
장탕은 혹리와 탐관을 한 몸에 지닌 잔혹한 탐관오리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직전의 혹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사진은 서안시 장안구에서 발견 발굴된 그의 무덤이다.

 

 

 

중앙집권 걸림돌 제거위해 왕온서 중용 
광평군의 ‘도불습유’는 왕온서의 명성을 크게 알렸다. 이 일을 보고받은 무제는 바로 왕온서를 하내군(지금의 하남성 무섭현 서남) 태수로 승진시켰다. 왕온서가 날개를 달았다.
하내군과 가까운 광평군에서 벼슬했던 왕온서는 하내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내군은 힘과 재력을 갖춘 호족 집안과 강대한 종족세력이 결탁하여 불법을 일삼는 일이 만연했다. 
관부는 이들의 위세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중앙집권 강화에 걸림돌이었다. 무제가 왕온서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바로 이런 세력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라는 뜻이었다.
하내군으로 부임한 왕온서는 관련 부서를 따로 하나 만들었다. 당시 역참을 통해 공문서를 전달하는 속도가 몹시 느리다는 점을 파악한 왕온서를 도성에 이르는 길목마다 개인용 말 50필을 배치시켜 또 다른 역참 역할을 하게 준비했다. 그런 다음 하내군에서 도성을 오가는 공문서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빠르게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왕온서는 광평군에서 하던 방법에 따라 중범죄자 중 용감한 자 몇을 관리로 만들어 제1선에서 호족세력을 체포하도록 배치했다. 이렇게 아주 짧은 시간에 이런 저런 이유를 달아 기본적으로 이 세력 거의 전부를 잡아들였다. 그런 다음 이들을 심문하여 무려 1,000여 집안을 연좌시켰다. 물론 무고한 백성들도 적지 않게 딸려 들어왔다.

황제의 눈도장에 폭주하는 살인 본능
첫 전투(?)에서 승리한 왕온서를 무제에게 바로 보고를 올려 이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큰 죄는 전가족 몰살, 작은 죄는 해당자 처형, 재산은 누가 되었건 모조리 국고로 환수한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무제는 즉시 재가했다. 
여기까지의 일처리는 불과 이틀이 걸렸고,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만명 가까운 사람이 망나니의 칼 아래 귀신이 되었고, 그들이 “흘린 피가 10리를 넘어 흘렀다.” 시신은 산처럼 쌓였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 때까지 불법을 일삼으며 발호하던 군내 호족과 지주에게는 자업자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된 무고한 백성들로 보자면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왕온서가 이 일을 완전히 마무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부임한 후 9월부터 12월까지 단 석달이었다. 그후 군은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릴지 않을 정도로 적막해졌고 사람들은 서로 눈짓으로만 의사를 주고받았다. 
행여 다른 군으로 달아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기어이 잡아왔다. 당시 사형수는 가을과 겨울에 형을 집행하게 되어 있었다. 도망친 사람들을 잡아들였을 때는 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왕온서는 “아이야, 겨울이 한달만 길었으면 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