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옥고와 독립운동에 혼신
잇따른 옥고와 독립운동에 혼신
  • 영광21
  • 승인 2006.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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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철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

평북 박천에서 태어난 현익철 선생은 경술국치 직후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11년 만주로 망명했다. 여기서 독립운동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위조하려다 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서간도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고, 3·1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활동했다.

1920년에는 광한단을 조직해 독립군 활동을 펴면서 국내로 잠입, 군자금 모집작전을 수행하다가 일경에 잡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다시 서간도로 망명해 1924년 남만주지역 독립운동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의 외무위원장, 1925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그 산하 군대인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또 다시 일경에 잡혀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1936년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로 또 다시 망명한 뒤 임시정부와 함께 남경, 장사로 이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해 그 대표로 항일민족역량의 통일을 위해 애쓰고, 앞장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8년 5월7일 불의의 총격으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