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에 초연한 고결한 선비의 마음
공명에 초연한 고결한 선비의 마음
  • 영광21
  • 승인 2006.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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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인의 난과의 만남 ② 유곡가인
난초는 옛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에 초연했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유곡가인(幽谷佳人), 군자향(君子香) 등으로 불리고 정절과 충성심의 상징으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난초의 상징성은 초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굴원이 난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됐다. 그러나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 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다가 미불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미불은 서예에도 뛰어났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그의 난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잎이 서로 교차하는데도 혼란치 않고 실로 희대의 기품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원나라 때는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과 설창 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묵란이 유행되기도 했는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관도승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마수정, 표표 등의 여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규수전신파라 부르기도 한다.

문인화가 널리 보편화되었던 명대에 와서 묵란은 더욱 크게 성행했고, 이러한 전통이 청대에도 계속 이어져 보다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묵란은 고려 말기에 전래돼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한 먹향기와 수려한 곡선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화가들에 의해 계승·발전돼 오면서 사군자 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훈련이 회화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주제의 하나로서 시, 서, 화에 능한 삼절(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춘란과 건란을 다룬다. 춘란은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정판교와 조선 말기의 김정희, 대원군 이하응, 금응원 등이 잘 그렸다.

백용인<영광군농업기술센터 연구개발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