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글 묵화에서 기록 선보여
고려시대 글 묵화에서 기록 선보여
  • 영광21
  • 승인 2006.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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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인의 난과의 만남 ⑤ - 우리나라의 난 역사
2500여년전 노나라의 공자에 의해 '난'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사용된 이래 1247년 <왕씨난보>와 같이 난의 종류와 재배법에 대해 기술한 책이 발간됐다.

우리나라의 난재배 역사는 1300년대 이후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에는 이규보, 이곡, 정몽주 등 문인들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난을 높은 격으로 노래했는데 '공자님이 거문고에 난조(蘭操)를 싣고 대부의 패에는 난을 새기네, 난 한송이가 열을 당하니 이에 다시 보고 사랑하노라'고 오설란(傲雪蘭)을 노래하여 충절을 나타냈다.

또한 매창이나 난설헌 등의 여류시인들은 물론 휴정이나 유정 등의 고승들의 작품에서도 난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묵란화(墨蘭畵)는 고려말 옥서침과 윤삼산의 그림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현존하는 최고품은 선조시대의 이증이 그린 춘란도이다. 특히 조선말 김정희와 이하응, 민영익 등의 그림은 현재도 명품 중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난에 관한 설명이 들어있는 문헌으로는 세종 31년인 1449년에 간행된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난혜의 종류가 많지 않은데, 분에 옮긴 후 잎이 점차 짧아지며 향기 또한 겨우 나는 정도여서 국향의 뜻을 잃는다.

그러나 호남연해의 여러 산에서 나는 것은 그 품종이 아름답다. 서리가 내린 후에 뿌리가 상하지 않게 자생지의 흙으로 싸주고 옛방식에 의하여 분에 심으면 좋다.

이것으로 15세기에는 이미 중국란이 들어와 관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춘란도 발견되어 길러졌던 것을 알수 있다.

계속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 <산림경제>, <임원십육지> 등 다수의 고문헌에서 난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특히 신경준의 <여암유고>에는 '아국제주독유혜(我國濟州獨有惠)'란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일경다화(一莖多花)인 한란(寒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그 후 한란은 김정희에 의해서 비로서 육지에까지 알려진 품종이다.

이렇듯 난에 관한 시문, 묵란도, 문헌들이 많으나 그 시대에 널리 가꾸어졌다고는 보기가 어렵고, 일부 지식층에 한정되고 그나마 많은 수는 관념에 의한 난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춘란은 향을 중요시하는 중국풍에 젖었던 지식층에 있어 <양화소록>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이 미미했다. 난이 보다 넓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 특권층에 의해서 움직이던 난취미계(蘭趣味界)가 1981년 수입자유화로 인하여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자생란을 원예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용인<영광군농업기술센터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