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일관했던 역사 실체 밝혀져야
침묵으로 일관했던 역사 실체 밝혀져야
  • 영광21
  • 승인 2006.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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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비망록
입을 두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그래서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죄인이 된 최규하 전대통령. 힘도 없었고, 임기도 가장 짧았던 비운의 대통령이 지난 10월2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26이라는 국가적 불행한 사태로 인해 갑작스럽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지 40여 일만에 체육관대통령(통일주체 국민회의)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15일 광복절을 즈음하여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아니 그보다 신군부 실권자인 전두환 일당에 의해 시원섭섭하게도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특히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재임시 12·12사태가 일어났고 뒤이어 5·18 광주시민학살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는데도 그는 하등의 대책도,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묵인해 버렸다. 그래서 국민들 사이에는 허수아비와 같은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동정론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참으로 무기력한 존재였다는 평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그가 실권은 없었다하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재임했기 때문에 신군부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했어야 했고, 또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광주에서의 잔혹한 시민학살 같은 엄청난 불행이 발생하지 않도록 민족의 안위를 위해 불의와 맞섰어야 했지만 결국 직무를 완전히 유기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10·26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이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가 싹트는 상황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기세싸움을 하고 있을 무렵 신군부 실체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 그에겐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신념과 소신이 과연 있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퇴임 후에도 이와 같은 중요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는 본인의 말이 끝까지 지켜진 셈이다.

특히 그는 외교관으로서 충분한 능력이 있었고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로 이름이 나 있었다. 더욱이 아랫사람에게도 부드럽고 따스하게 대했고 가장으로서도 훌륭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재계 인사들을 비롯하여 친인척, 지인 등 생전에 방문객보다도 많은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한다.

특히 우리 역사의 중심에 섰던 최규하 전대통령과 그의 영전에 조문객으로 선 전두환 전대통령의 모습은 누가 봐도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고 최규하 전대통령은 평소 꼼꼼히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는데다 무엇이든 섬세하고 자상하게 기록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80년대초 역사적 상황을 기록한 비망록이 분명 있을 거라고 가족들은 물론 측근들이 주장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첫째 12·12사태 때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 체포영장에 그가 과연 서명을 했는지
둘째, 80년 광주시민 학살때 발포명령을 사전에 알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셋째, 81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 그 배경과 신군부의 개입 정도 등 그동안 그가 침묵으로 일관했던 역사적 진실이 비망록에 의해 낱낱이 밝혀지기를 많은 국민들은 모름지기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인 평가는 일단 미루어 둔 채로 개인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비는 바이다.

정병희<홍농농협 전조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