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 / 김광제·서상돈 선생

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 주도하신 김광제·서상돈 선생 두분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광제 선생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한 뒤 관직으로 나아가 훈련원 첨정,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동래경무관으로 재직 중,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크게 저항했다.
관직을 사직하면서 친일파 탄핵과 내정의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06년 대구로 옮겨 서상돈 선생과 함께 광문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서상돈 선생은 경북 김천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보부상으로 출발해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다.
천주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여기에 적극 참여했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다.
하지만 수구파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 선생과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됐다.
1907년 1월 광문사 특별회의를 마친 뒤 서상돈 선생의 발의와 김광제 선생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올렸다.
금주·단연으로 의연금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이후 전국 각지로 파급돼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조직된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주도했고 그 중심에는 이 운동을 발의해 주도한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 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두 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김광제 선생, 1999년 서상돈 선생에게 각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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