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과 지리산 그리고 난초 전설
최치원과 지리산 그리고 난초 전설
  • 영광21
  • 승인 2007.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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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인의 난과의 만남 25 -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의 경주 최씨이다. 육두품이란 제6위 관인 아찬(阿 )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기에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나이 12세에 혼자 당나라의 유학길에 오른다.

18세에 빈공과에 응시해 내노라하는 석학들을 물리치고 금방(金榜 : 장원)을 차지해 선주표수현위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며 즐겨 학문연구에 힘을 기울여 <중산부궤집>을 저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는가 하면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르고 얼마 후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이라는 벼슬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까지 승사받았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규탄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한다. “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이 한편의 글이 능히 간담을 서늘케 해 적괴(賊魁)인 황소가 말 위에서 혼비백산 떨어지더니 항복하고 말았다.

최치원은 28세 때에 귀국했는데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 의하면 최치원의 46문집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적고 있다. 현종 11년(1020년) 왕은 조서를 내려 내사령, 14년엔 문창후(文昌候)란 시호를 내렸는데 아호는 고운(孤雲)으로 우리나라 18유현의 한 사람이며 만년 기록이 없고 장생(長生)하여 지리산에서 신선계(神仙界)에 들었다고만 전하고 있다.

고운과는 5백여년의 시간차가 있는 남추(南趨)는 곡성 사람으로 아호를 '선은'이라 하는데 워낙 재질이 출중해 배우지 않아도 모든 학문을 능히 통달했다. 중종 21년인 1526년 진사에 급제했으나 모함을 받아 곡성의 서계(西溪)로 들어가 선도의 수련법을 익혀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푸른 풀을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올라가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서찰을 주고 회답을 받아 오라고 시켰다.

하인은 지리산이 처음 길이지만 가을이라 고사된 풀 사이로 파랗게 나와있는 난초만 따라가니 무사히 청학동에 오를 수 있었다. 한자락 구름이 잠겨드는 큰 바위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다가 하인을 보고, 이미 올줄 알았다며 짙푸른 난초화분 하나를 내어 주었다. 하인이 인사하고 산을 내려오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산에 오를 때에는 틀림없이 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온 산에 가득한 가을이었는데 내려오는 길엔 손에 든 난초에 꽃이 피어있고 여기저기 풀잎 사이로 작은 꽃들이 만발한 봄이었다. “그것 참 이상도 하다. 내가 산에 있었던 것은 기껏 두어 시각뿐이었는데….”

남추는 그 난초를 무척이나 아끼고 돌보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난초화분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바둑을 두었던 두 사람은 신라시대 대문장인 최치원과 이승(異僧) 검단선사였다고 전한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4대명산 중의 하나로 그 수려한 경개는 선경을 방불케 하기 충분하고 선록(仙綠) 깃든 녹음 속에는 지금도 신선이 노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