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지역 격동의 세월 20세기 ② - 한말 영광 사람들의 생활

민장(民狀)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관청에 호소하는 문서를 일컽는다. 요즘으로 말하면, 민사소송과 같은 것이었다. 백성들은 먼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소지(所志)를 관청에 제출하는데 이를 민장(民狀)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장을 모아 놓은 것이 『민장치부책』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들이 억울한 사실을 소지로 올리면 수령은 그에 대한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수령의 처결문을 제음(題音=데김)이라 한다.
데김은 일종의 즉결심판문이었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데김을 증빙자료로 삼기 위해 판결문을 정식으로 요구하면, 관청에서는 '입안(立案)' '절목(節目)' '완문(完文)'의 형태로 작성하여 주었다. 백성들은 소송 이후 관의 처결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았을 경우, 사안을 바로 잡기 위해 이 증빙서류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민장치부책』에는 당시 영광 사람들의 생활이 그대로 베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민장을 통해 100여년전 영광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애환을 더듬어 올라가보자.
100살 먹은 노인에게 부역을
21세기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의 경우, 평균수명이 현재, 70대 중반이며, 10년 후에는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로 전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 한국인들의 평균수명은 얼마였을까.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평균 5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장수한 노인들에 대해서는 과거와 세금 등에 대해 특별히 예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당시 영광에는 100세가 넘은 장수 노인이 살고 있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100세가 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100세가 넘는 노인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특별한 포상 등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00살이 넘은 노인에게 특별한 포상은 커녕 호역(戶役-부역)을 내리자, 이를 구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기록이 보여 주목된다.
즉, 영광의 삼남면(森南面) 정종원(鄭鍾元)은 소장을 올려 "제 아비가 100세 노인이므로 관에서 이를 인정하고 호역을 면제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 홀연히 해마다 돈으로 환산하여 강제로 빼앗아 갑니다"고 영광의 수령에게 소지를 올렸다. 이에 영광 수령은 "이미 이를 인정해 놓고 지금에 와서 어찌 강제로 하려 하느냐. 이를 면제하여 줌이 마땅하다."(1870년 6월23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다. 영광 역시 과다한 세금 징수로 많은 이들이 소장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정종원의 사례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요즘 한국사회는 '술 권하는 사회'라고도 한다. 술 권하는 사회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주가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진짜 사회가 술을 권하는 분위기 일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술 권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뒷처리'는 깨끗할수록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최선이다.
1870년 홍농면(弘農面) 가마미(駕馬尾)에 김○만이라는 술꾼이 살았던 모양이다. 김○만은 이 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이소사(李召史)의 주막에 들렀다. 그리고 주인에게 외상술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이소사는 외상술이라는 말에 술을 주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있던 김씨는 이소사의 딸을 구타하였다. 이에 이소사는 김씨를 관가에 고소하였다. 그러자 수령은 포청에서 김씨를 잡아들여 공장 40대를 치고 감장(監杖)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870년 6월24일)
김씨가 술을 마셔야만 했던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사회도 술을 권하는 사회였는지는 모르지만, 외상술과 폭행은 예나 지금이나 '주도(酒道)'와는 거리가 멀었나 보다.
박 이 준<목포대 호남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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