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인의 蘭과의 만남 30 - 난을 널리 알리자!
30여년전의 한국 난문화는 태동기였다. 말 그대로 난 취미인들의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은 사람이 난을 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난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자긍심이 대단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들이었고 과연 한국춘란이 앞서 개발한 외국에 비해 뛰어난 품종이 있을 것인가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던 시기였다.우리나라에도 그런 품종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난을 찾아 나선식이었다. 그래도 제주한란은 제주에서도 매우 귀했기 때문에 한란을 하는 사람들은 그 긍지가 대단했다.
외부로 반출이 안 되어 제주한란을 가진 사람은 난을 소장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선민의식이 있을 정도였다.
이때는 중국이나 일본춘란을 하는 것도 일본의 책을 보면서 부러워했고 중국춘란 ‘송매’가 최고로 갖고 싶은 난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다행히 이후에 우수한 산채품이 많이 나와 한국춘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민족의 난인 자생란을 하는 사람들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중국에도 20여년전에 일어났다. 물론 일본에도 그런 열병 같이 일본춘란을 아끼고 찾아 나선 기간이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있었다.
이렇듯 각 나라마다 자국의 난을 아끼는 운동으로 인해 그 저력으로 난문화계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난 전시장만 찾아도 노화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년전의 얼굴이나 지금이나 거의가 세월만 보낸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셈이다.
우리는 어떤가? 30여년전 난을 하던 사람들은 거의가 50세가 안된 젊은 층이었다. 물론 나이가 많은 분들도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분들을 모시고 난을 하는 식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때의 사람들이 8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난문화계가 나이가 드는 것이다. 난문화의 황금시기는 젊은 사람들이 많을 때 지속된다.
지금의 유명한 난인이 30여년전에도 유명한 애란인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난문화계에 입문해 특출한 족적을 남겼지만 한국 난문화계의 발전은 젊은 난인들이 이끌어 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본은 난문화계가 노화되어 탄력을 잃은 것 같은 분위기가 보인다. 난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당장 일반 난우회 소속의 회원들만 보더라도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한국 난문화가 활짝 꽃핀 시기이다.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난계에 계속 유입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젊은 애란인을 만들어내고 난문화계로 이끌어 주어야 할 때다.
몇년후에 일어날 노화현상을 방지하고 우수한 전통문화로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기꺼이 젊은 난인들을 양성해 그들에게 희망과 난의 묘미를 가르쳐 주는 운동에 앞장서야겠다.
젊은 애란인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멋있는 선배 난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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