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수집가를 통해 본 인간의 내면
난초수집가를 통해 본 인간의 내면
  • 영광21
  • 승인 2007.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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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인의 난과의 만남 34 - <난초도둑>의 유령난초
필자가 난과 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안 지인에게 선물 받은 책인데 틈을 못내고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에서야 읽었다.

착생식물을 의미하는 브롬엘리아드, 그중에서도 유령난초를 찾아 늪지를 여행한다. ‘나무에 붙어서 살아가는 착생식물과에 속하는 메마르고 삐죽삐죽 가시가 돋친 브롬엘리아드와 난초...(p26)’

아름다우면서 희귀한, 하지만 재배하기 어려운 폴라리자 린데니, 일명 ‘유령난초’를 대량 복제하려는 난초광 라로슈의 이야기로 마치 영원의 향수를 만들고자 했던 그르누이(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연상하게 한다.

라로슈는 나비가 꽃의 색과 향의 이미지에 이끌리듯, 돈벌이보다는 난초라는 존재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몰입한다. ‘미치광이 같은 영감에 휘둘리며...(p70)’ 난초에 집착한다. 급기야 난초를 밀반출하려다 적발돼 추진중인 프로젝트가 뒤틀리고 동료들로부터 외면받자 난에 대한 열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일순간에 사그라진다.

아직은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난초에 대해 깊이있는 많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난초를 소재로 적은 전문 소설이라기보다는 난초에 대해 설명한 논픽션에 가깝게 느껴진다.

초반의 인물과 사건중심(라로슈와 난초 채취)의 흐름과는 달리 중반으로 갈수록 난초의 역사적인, 과학적인, 학술적인 얘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책 뒷면에 소개된 ‘난초수집가들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 내면의 어두운 열정과 집착!’이라는 소설적 느낌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물론 조금은 지루한 감도 없지 않으나 난초에 대해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룬 점은 높이 사주고 싶다.

책 초반의 난초라는 청초한 식물에 대한 관심이 중·후반부의 ‘난초학습’을 거치면서 더욱 책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난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야 상당한 재미와 지식이 전달될 수 있겠지만 난초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겐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것 같다.

책 내용중 라로슈가 교접을 통해 새로운 난초를 만들 때의 말이 기억난다.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이 있으니까요. 나는 상상의 식물학을 믿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식물의 관점에서 보고 식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목적이 전혀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오직 잡종들 밖에 없습니다.(p150)” 그렇다면 인간이기 이전 나의 특징은 무엇인가. 식물과 나 그리고 나와 난초를 비교해 보는 또 다른 시간을 갖게 한다.

<난초도둑>은 유령난초를 찾아 오지를 떠도는 모험가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 역)의 인생역정, 전형적인 중년의 뉴요커로 안락한 삶을 누리던 저널리스트 수잔이 존과 만나게 되며 열리게 된 감정의 우물을 그린 책이다.

지저분하고 괴짜인 취재 대상으로 존에 접근했던 수잔은 스스로의 삶에 빈 구석이라 여겼던 그의 야생성과 열정에 빠져들며 차차 그와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난초도둑>의 마지막 장은 “허무한 환상은 잡을 수 없다”고 마침표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