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역경속에 새마을금고 기반조성
파란만장 역경속에 새마을금고 기반조성
  • 박은정
  • 승인 2010.01.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택 / 정주새마을금고 초대 이사장
차례로 이어 나가는 자리나 지위에서 첫번째에 해당하는 차례 또는 한 계통의 연대나 세대의 첫머리를 말하는 ‘초대’. 어떤 일을 시작하는 조직이나 기관에서 처음을 이끄는 사람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완성을 완성으로 만들어 가며 숱한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올해 창립 47주년을 맡는 정주새마을금고. 이곳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김영택(85)씨도 많은 역경을 딛고 오늘의 정주새마을금고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군서면 가사리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마치고 16세 되던해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하며 생활하던 김 씨는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귀국해 농사를 짓다 경찰생활을 했지만 6·25가 일어나 경찰직을 떠났다. 이후 다시 농사꾼으로 돌아와 생활하던 그는 1976년 50대 초반 정주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아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마을금고 운동은 뚜렷한 이념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명칭도 금고가 아닌 신용조합이었다”고 새마을금고의 역사를 말하는 김 씨.

그는 “이렇게 시작된 운동은 이후 급속히 뻗어 나갔고 주된 사업으로 지도, 육성되던 시절 초대 이사장을 맡았지만 지역의 사정을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며 “자산을 조성하고 조합원을 늘리기 위해 휴일도 없이 비가 오나 눈이오나 주민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지난시절을 돌이켰다.

이렇게 불철주야 새마을금고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김 씨는 차츰 자립기반을 조성해 나갔고 현재의 정주새마을금고의 기틀을 다지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직원들과 조합원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가게를 운영하는 아내와 슬하에 3남3녀를 뒀던 김 씨는 아내가 “새마을금고의 귀신이 씌웠다”고 할 만큼 가정은 뒷전에 두고 새마을금고 일에만 전념했다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차를, 소주와 막걸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술을 권하며 금고를 위해 주민들과 가까이 지냈던 김 씨.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며 전라남도에서 1등을 차지했고 중앙회로부터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김 씨는 경영우수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은장을 받기도 했다.

20여년동안 성실히 최선을 다해 과업을 수행하고 퇴임한 김 씨는 현재 청력도 떨어지고 심장병, 당뇨 등의 지병으로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영광읍 백학리 정주새마을금고가 위치한 맞은편에 살고 있는 김 씨는 “날마다 새마을금고를 바라보며 잘되기를 바란다”며 “군민을 위한 금고로 맡은 소임을 다하며 백년대계 발전되길 희망한다”고 애정을 전하며 여전히 ‘금고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박은정 기자 ej0950@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