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을 기준으로 낮은 점점 줄어들고 밤의 길이는 점점 길어지며 그만큼 깊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추분이 지닌 의미가 이것이 다인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철종 10년(1859년)>의 기록에 보면 “(임금이) ‘성문의 자물쇠를 여는데 대해 의견을 모으라고 하면서 종치는 시각은 예부터 전해오는 관례에 준해서 행하라’는 지시를 했고 추분뒤의 자정 3각에 파루(罷漏-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해 종각의 종을 서른세번 치던 일)게 되면 그다지 이르지도 늦지도 않아서 딱 중간에 해당해 중도에 맞게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분에 종치는 일조차 중도의 균형감각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더도 덜도 치우침이 없는 날이 추분인 것으로 여기고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곳에 덕이 있다는 뜻이며 이를 중용이라고 여겼다.
그런가 하면 추분엔 향과 연관된 의미를 품고 있다. 추분의 들녘에 서면 벼의 알곡이 야무지게 익어가는데 그 냄새를 향이라고 표현했다. 벼를 뜻하는 화禾와 날을 뜻하는 일日자가 합해진 글자다. 한여름 뜨거운 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벼는 그 안에 야무지고 진한 향기를 품는다. 이처럼 사람도 내면에 치열한 내공을 쌓아갈 때 아름다운 향기를 피우게 된다.
벼뿐만 아니라 들판에서 익어가는 각종 곡식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디면서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공을 충실하게 쌓은 사람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와 같은 곡식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같은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추분은 중용과 내면의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절기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기합리화와 자기방어에 능숙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도 무의식중에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한 다양한 재료를 끊임없이 찾는 버릇이 있다. 내가 아는 지인들 중에도 비교적 책을 많이 있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도 지난날 자신이 토론이나 말싸움에 졌을 때를 항상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공부에 임하면 전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이기주의가 된다. 심지어는 자기가 지금까지 쌓은 지식과 많은 경험의 틀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에 대한 벽만 더 단단하게 쌓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제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아도 오히려 퇴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도 의사소통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기 방어적인 생각을 버리고 ‘저 부분까지는 내가 미치지 못했으니 나중에 고쳐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가 몰랐던 점과 고쳐야 할 점을 보게 돼 발전 지향적인 태도를 갖추게 된다.
지금 세상은 전문가끼리도 일을 나누어 하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도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하는 시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문 지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원활한 협업을 하는 능력이다. 심지어는 지식과 경험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실적을 내고 인정을 받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추분을 보내면서 중도와 중용이 떠올라 거기에 관한 글을 써보았다. 백번 고민하는 것보다 비록 작은 일일지언정 한가지라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훨씬 값지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게 세상을 사는 의미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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