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 전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
가정마저 저버린 새마을교육/ 무쇠도 금이 가는가 / 계절이 바뀌는 무서운 설한풍/ 임의 귀거래에 주름진 얼굴들의 애환이 따랐으니 은혜로 밭을 갈던 임은 / 한그루 우람한 느티나무.시인이자 수필가인 어떤 이가 지난 2005년 팔순을 맞은 김 준(86)옹에게 올린 한편의 시
일부분이다.
군남 포천에서 8남매중 형과 누나 셋에 이어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김 준옹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농촌의 아들로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온 그는 서울농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근무를 했지만 폐결핵을 앓으며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6·25를 겪었다.
이후 전남대학교 농대교수로 재직을 했지만 자신이 뜻한 바를 펼치기 위해 순창의 한 시골마을에서 낮에는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벌과 염소를 기르며 밤에는 성경공부를 하며 주경야독에 빠져 살았다.
이렇게 초야에 묻혀 주변을 성찰하며 자신을 수양하던 김 옹은 고 박정희 대통령 정권시절 재건운동본부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해 줄 것을 제안받아 다시 속세속으로 나왔다. 이후 재건운동본부 교육원 교수부장 등을 지냈고 농협대학이 설립되면서 창립멤버로 교수를 역임했던 김 옹은 농협중앙회 연수원장 등을 지내다 잘사는 농촌을 위해 농민운동을 펼쳤던 교수들의 추천으로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으로 부임했다.
농촌에서 나고 자라 열악한 농촌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모색에 늘 고심이었던 김 옹은 새마을운동본부중앙회장을 지내며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해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새마을가꾸기운동을 펼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실세들의 아귀다툼에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허수아비가 되자 자리를 과감히 청산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다시 학자의 길로 접어들어 남도학숙 원장과 초당대 총장 등을 역임했지만 추구하는 이상과 이념 등에 대한 이질감에 휩쌓여 자리를 사직했다.
그후 무임교수로 활동하며 희망하는 곳을 찾아 강의를 펼쳤던 김 옹은 뇌수종으로 건강이 악화되며 그간의 활동을 모두 접고 현재는 병상에 누워있다.
군남 포천리에서 김 의원을 운영하는 김 옹의 막내 동생인 김수영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린 것으로 온 세상은 알고 있지만 그 뒤에는 저희 형님 같은 분들이 많이 있었다”며 “특히 형님은 어린시절부터 가슴에 맺혔던 농촌현실에 대한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기위해 진정한 새마을운동을 펼치기 위한 모태를 마련한 숨은 공로자다”고 형의 공적을 강조했다.
1남3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 김 옹은 현재 경기도 과천에 거주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의 근간을 마련하며 불철주야 올곧은 뜻을 펼쳤던 김 준옹은 독재정권속에 묻혀 세상에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훌륭한 과업은 후세들이 제대로 찾아 되새겨야 하는 중요한 정신이 되고 있다.
박은정 기자 ej0950@yg21.co.kr
저작권자 © 영광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