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는 롯카쇼무라 방사능 폐기장이 있는 아오모리현을 찾아 방사능 폐기장 건립배경 및 관리실태를 파악하고 재정 파탄후 복구 과정을 지나고 있는 유바리시 시장 및 시의장 면담 등의 일정으로 이뤄졌다. 영광군의회가 제출한 5일간의 해외연수 보고서를 싣는다.
/ 편집자 주
1. 롯카쇼무라 방사능 폐기장
일본 혼슈섬의 최북단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롯카쇼무라六ヶ所村는 일본 핵관련 시설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은 전국의 원전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모아 플루토늄을 추출해 보관하는 곳이다.
방사능 폐기장은 우라늄 농축공장, 사용후 핵연료 수용·저장시설, 재처리 공장,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하는 저장관리센터, 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혼합산화물연료(MOX) 가공시설로 이뤄져 있다.
롯카쇼무라에 핵연료 부산물 종합처리장이 들어선 1984년 인구는 1만1,003명이었으며 2010년 기준일 현재 1만1,095명이다. 결론적으로 롯카쇼무라의 인구는 종합처리장이 들어선 이전과 이후 인구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었다.
롯카쇼무라 재정은 종합처리장이 들어선 1984년 33억8,200만엔이었던 것이 2003년 100억5,625만엔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종합처리장 건설 이전에 지역주민의 대부분이 종사한 1차산업인 농가호수 통계를 보면 종합처리장이 유치된 1984년에 1,410호였던 것이 2003년에는 654호로 50% 이상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종합처리장에서 지역지원기금으로 422억8,000만엔이 지원됐으며 이중 롯카쇼무라에는 45.3%인 191억580만엔, 아오모리현에 4.1%인 17억12만엔, 인근지역에 50.6%인 214억13만엔이 지원됐다. 롯카쇼무라 지원금의 주 사용처는 개인보상은 없으나 문화교류 프라자, 향토관, 중학교, 도서관, 체육시설 등에 사용됐다고 한다.
롯카쇼무라 주민들의 반응
종합처리장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며 외국인들까지 가세해 반대를 외쳐 실제 주민들을 설득하는데 1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 들었다. 롯카쇼무라에 종합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주민의 복지혜택은 조금 나아졌지만 경제적 여건은 변화가 거의 없다는 의견이 많다. 또 아오모리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대다수가 종합처리장과 관련해 87.5%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지역지원금 효과는 69.8%가 효과를 느끼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롯카쇼무라 방사능 폐기장 안내장 직원의 안내로 견학을 하면서 우리 연수단의 질문에 대해 직원들은 일본에서 발생되는 모든 핵폐기물은 선박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며 고준위폐기물은 재처리시설로 보내지고 각 발전소에서 1차 처리된 중·저준위 폐기물 드럼통은 현재 26만봉이 있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도 100년 정도는 보관이 가능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이 상주해 일본정부감시관과는 별도로 핵관련 물질 등에 대해 관리·감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동의를 제대로 얻지 않고 핵복합 시설단지 건립을 추진해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고 설득하는데 10년이라는 장기간이 소요됐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롯카쇼무라에서는 농업, 어업, 낙농업의 1차산업이 이뤄지고 있으나 롯카쇼무라 이름으로 타 지역에 판매하는 농수산물은 없다.
그 이유는 롯카쇼무라 이름으로 판매하게 되면 핵관련 시설에서 나온 농수산물로 일본인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판매에 어려움이 있어 인근농협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내 전체 원전은 작년 여름부터 가동 중지상태이며 철저한 심사를 통해 안전성 검증후 재가동 계획이라고 한다. 원전 모니터링은 지자체와 회사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 민간에서 모니터링은 별도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2. 유바리시 방문
2006년 6월 유바리시 시청 4층에서 고토우겐지 시장은 재정파탄 선언을 표명한 후 사흘 후에 열린 제2회 유바리시의회 정기회에서 공식적으로 재정재건단체 신청을 요청했다.
당시 유바리시의 부채 총액은 632억엔. 요즘 우리 돈으로 약 7,000억원에 달하는 액수로 이중 순 적자액은 360억엔으로 당시 유바리시 표준재정규모인 45억엔의 8배에 달했다.
결국 2007년 3월 유바리시는 지방재정 재건촉진 특별조치법에 따라 재정재건단체로 지정됐고 현재까지도 자치권을 상실한 채 국가와 도의 감시와 감독을 받으며 재생에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유바리시는 빚을 줄이기 위해 2007년에는 137건의 물건을 경매시장에 내놨고 같은 해 10월에는 시청사까지 매각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시장이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유바리시 시장과의 면담을 통해 “지방재생노력의 자구책이 무엇이냐”는 우리 연수단의 질문에 시장은 “무엇보다도 탄광촌이 폐쇄되고 유바리시 전체 인구중 65세이상이 46%를 차지하는 등 고령화 문제로 인해 지방재정상태가 안 좋은 상황이다”며 “그러나 17년에 걸쳐 채무를 갚아나가야 하므로 시민들에게 들어가는 예산을 최대한 절약해 아끼면서도 시민들에게 희망과 밝은 전망을 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질문에 시장은 “유바리시가 넓은 편인데 고령자들이 넓게 분산돼 있어 생활이 어려워지므로 노인들을 한곳에 모여서 생활할 수 있는 노인촌을 만들어 복지·의료 혜택을 제때 받을 수 있게끔 하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유바리시의 재정파탄 원인
유바리시의 역사는 1874년 미국의 광산지질학자 벤자민 스미스 라이만이 이끌던 탐험대가 유바리 계곡 하천 상류에서 탄광지질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시작됐다. 1892년 유바리탄산에서 채광에 돌입하면서 일본 제1의 석탄지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 정부는 국가재건을 위해 적극적으로 석탄산업을 지원했고 이로 인해 유바리시는 북탄지대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1960년 초에는 22개소의 광산에서 연간 3,297t의 석탄을 생산하기도 했다. 당시 종업원 수는 1만6,027명, 인구는 1960년 4월말 현재 11만6,908명에 달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에너지 정책이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가면서 유바리시의 석탄산업도 급격히 사양길로 접어들어 1974년 4월에는 인구가 5만4,882명이 급감했고 탄광은 5개소만 남았다.
물론 급격한 석탄광산의 쇠퇴과정에는 잦은 탄광사고도 큰 몫을 하게 됐다. 1908년에는 가스폭발로 93명이 사망했고 1914년에는 423명, 1938년에 161명, 1960년에 42명, 1981년 93명 등 크고 작은 사망사고가 석탄산업의 종말을 앞당겼다고 볼 수 있겠다.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미츠비시미나미오오 유바리탄광도 1985년 62명이 사망한 가스폭발로 1990년 도산을 했고 이로써 100여년에 걸친 유바리시의 탄광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도한 관광 개발
1971년부터 8년간 유바리시 부시장으로 근무하며 탄광산업의 몰락과 인구 급감에 따른 도시의 피폐화를 지켜보던 나카타테츠지 시장은 1979년 4월 시장으로 무투표 당선된 뒤 24년 동안 6차례 재임에 성공하면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야심차게 관광시책을 추진했다. <석탄에서 관광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석탄의 검은 이미지를 가진 유바리시를 녹색 이미지의 도시로 바꾸는 데 주력했다.
이후 1980년 유바리시 석탄박물관 조성에 14억8,300억엔을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1983년에는 석탄 역사촌(유원지) 건설에 32억3,000만엔, 1985년에는 멜론성을 조성하면서 6억5,000만엔, 1988년에는 로봇 대과학관을 건설하며 8억5,000만엔, 2002년에는 마운트레이시 스키리조트를 인수하는 데 26억엔을 투자하는 등 광폭적인 투자사업을 펼쳤다.
특히 영화광이었던 나카타 시장은 정부의 자금을 끌어다가 국제영화제를 개최한다. 다들 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유바리시에 누가 오겠는가 걱정들을 했지만 1990년 처음 열린 영화제에 1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이루고 오늘날 유바리 환타스틱영화제는 유바리시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1993년 이후 관광객수가 감소추세로 전환됐음에도 시장은 숙박시설과 온천시설의 건설에 나섰고 여기에는 지방채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0년 인구 4만1,715명이던 유바리시의 관광객 수는 연 55만2,000명에 달했고 인구 3만1,665명이던 1985년에는 관광객 184만9,000명, 인구가 2만명선으로 감소했던 1991년에는 관광객이 230만5,000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 지자체에서도 관광산업에 투자를 하면서 관광객 수가 점차 감소했고 버블경기의 붕괴와 경기침체의 장기화까지 이어지면서 끝내 유바리시는 파국을 맞고 말았다. 재정파탄 선언 직후 유바리시의 전체 관광시설은 일시에 영업을 중단했다가 삿포르시의 대표적인 관광업체인 카모리관광이 유바리리조트(주)를 설립한 뒤 유바리시 관광시설의 전부를 위탁받아 2007년부터 영업을 재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탄광회사 자산 인수가 결정타
나카타 시장이 당선됐을 당시 유바리시의 주민생활과 직결된 각종 시설을 운영했던 탄광회사들이 문을 닫게 됐다. 특히 북탄이 운영하는 탄광이 많았는데 북탄의 도산으로 유바리시를 떠나가는 주민들을 잡기 위해 나카타 시장은 북탄이 소유한 땅과 주택, 병원 등을 매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호텔, 리조트시설, 상하수도시설, 심지어 탄광촌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중 약 5,000호를 시에서 인수해 시영주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파산한 회사 노동자의 임금과 퇴직금까지 떠안게 돼 유바리시의 재정압박을 더욱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나카타 시장이 퇴임 직전인 2002년에 결정한 마스시타 코우잔의 리조트시설의 인수가 재정파탄의 결정타가 됐다.
나카타 시장의 장기 집권
유바리시 부시장 출신인 나카타 시장은 3회를 계속 무투표 당선된 뒤 재정이 악화일로를 치닫던 1991년 4번째 선거에서도 상대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이후 2차례 선거에서도 승리하는 등 유바리시 주민들의 나카타 시장에 대한 신뢰는 이처럼 거의 병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나카타 시장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선거에서가 아니라 지병에 의한 사망이었다.
허술한 재정감시 시스템
유바리시가 재정재건단체를 표명한 후 홋카이도청의 기획진흥부에서는 강도 높게 현지조사를 실시했고 2006년 재정파탄의 주된 원인을 부적절한 회계처리 때문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유바리시는 출납정리기간에 세금징수 관계자 등과 공모한 후 타회계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일반회계에서 일시차입금 형태로 빌려 타 회계에 빌려주는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전년도의 일반회계와 다음연도의 타회계가 겹치는 출납정리기간에 다음연도의 다른 많은 회계에서 변제받는 방식으로 적자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재정재건단체 지정을 회피하기 위해 재정담당자들 사이에 속칭 점프방식이라고 부르는 회계처리를 반복하면서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
물론 이 과정에서 감독권한을 가졌던 정부와 홋카이도의 공무원, 세입을 담당했던 유바리시 공무원 등과 관련해 엄격한 통제를 못한 유바리시 의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악한 기간산업
이 당시 석탄 외 유바리시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은 멜론이 대부분이었다. 유바리시의 풍토에 가장 적합한 농사는 멜론뿐이었고 그래서 1961년에 멜론조합을 결성한 유바리시의 농업인들은 1962년 신품종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나카타 시장도 퇴임전 농가를 방문해 “석탄시대는 갔고 이제 농사밖에 없다”면서 농민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012년 3월말 현재 유바리시 농업인구의 93.9%, 500여세대가 멜론 농사를 지어 25억엔 정도의 생산액을 달성하고 있다. 일부는 콩이나 벼를 재배하고 있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농산물 생산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이처럼 유바리시의 자원이라고는 석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유바리시의 재정재생계획
잘 알려진 대로 유바리시는 재정재생계획을 통해 정원을 2006년 309명에서 2012년 1월 현재 145명으로 감축하고 직원들의 급여도 40~60% 삭감했다. 또한 초등학교 7개소와 중학교 4개소를 하나로 통합해 학생들은 20~30분씩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한다.
미술관, 수영장, 유원지 등 문화시설 폐쇄 등 모든 무료 문화시설 혜택을 줄였다. 시 관계자는 “주민들이 떠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주민세와 자동차세, 수도요금이 급등하고 그전까지 무료였던 쓰레기 수거료도 부담하고 있다. 미술관을 닫고 1,000여 점의 미술품을 매각하기도 했다.
다만 당초 재정재건계획에서 ‘전국 최고의 주민 부담, 최저수준의 행정서비스’를 지키라고 했던 원칙이 2006년 12월 차기선거를 대비한 아베수상의 지시에 의해 ‘주민생활이 일정수준 유지’하는 것으로 다소 완화됐을 뿐이다.
2011년 4월 제17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유바리시 시민들은 당시 29세였던 스즈키나오미치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2008년 1월 재정재건계획 지도감독을 위해 도쿄도에서 파견된 말단직원이 2년2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보여준 열정에 감동한 것이다.
스즈키 시장은 이후 부시장과 관용차를 없애고 더욱 강경한 재건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시장과 주민과의 간담회, 지역담당직원 제도 등 다양한 행정개혁을 추진하고 유바리시 다큐멘타리투어 판매 등 특수시책과 기업유치를 통해 유바리시 재생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주민들이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 건설을 목표로 현재는 시영주택의 재편 집약화를 중심으로 시가지의 콤팩트화를 도모하면서 노인들과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홋카이도와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단계다.
특히 스즈키 시장은 2개월에 한번씩 동경을 다니며(여비를 아끼기 위해 대학이나 기업 등의 강연회에 참석할 때 병행) 유바리시 부채의 탕감과 재생기간 단축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와 홋카이도, 유바리시 3자 협의회를 통해 실무자들이 긴밀히 재정재건에 힘을 기울이고 시장과 홋카이도지사, 총리대신이 필요한 사항을 협의하는 식으로 유바리시의 재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시성 행사 지방재정 악화 요인
유바리시 관광객이 200만명을 넘었을 때도 유바리시의 관광수입이 일부 관광업체들의 배만 불렸을 뿐 지역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각종 리조트시설이나 영화제 등을 보러온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지역에 뿌리고 간 돈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호텔 리조트를 즐기고 삿포로나 인근 오타루시 등으로 빠져나간 것.
이를 통해 민선 초기 우리군의 인근 지자체에서 추진한 1회성 축제성 행사후 수년이 지난 현재 시설물관리 등을 위한 지방재정 악화 요인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성, 축제성 행사에 대한 사례에 대해 깊이 숙고 해야 함을 느꼈다.
유바리시의 사례는 이제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우리나라도 지방채무가 공식적으로는 27조원이지만 민자사업(BLT) 등 숨겨진 부채를 포함하면 126조에 달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민선이후 재정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각종 축제 등 전시성, 선심성 행사가 급증하고 경쟁적으로 치적쌓기용 대형 개발사업을 추진함으로서 대부분 지자체들이 빚더미에 않게 됐다.
급기야는 판교개발로 인한 빚으로 신규사업이 불가능하게 된 성남시장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책임은 결국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중앙집권시대의 재정구조를 타파하고 자기 책임하에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영광군의회 해외연수 성과
이번 영광군의회 해외연수는 연수기간중 원전문제와 지방재정 사례연구 등을 통해 우리 군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데 중점을 뒀다. 또한 우리군의 꽃인 상사화를 사진으로 제작해 시장과 시의장에게 전달하고 일본어판 영광군 홍보책자를 시청과 시의회에 비치하는 등 군 홍보활동도 전개했다.
연수기간중 일본의 깨끗한 거리와 일본인들의 자기업무에 대한 책임감, 친절함은 깊이 배워야 할 부분임을 느꼈다. 특히 자동차를 구매하고자 할 경우 자기 주차장 확보사항이 필수조건으로 돼 있어 불법주·정차가 전혀 없다는 점은 우리나라도 검토해 볼 사항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