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복지’의 논쟁에 대한 유감
‘안정과 복지’의 논쟁에 대한 유감
  • 영광21
  • 승인 2008.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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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온 군인들이 내건 명분 중 하나였다.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어 치우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이 수백배로 커졌는데도 기득권 세력은 자발적으로 나눠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역사와 경험이 보여주는 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게 됐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소위 ‘안정과 복지’의 논쟁에서 우리가 첫번째로 우려해야 할 바는 그 토론의 핵심이 정책의 ‘대상’보다는 정책의 ‘수단’쪽으로 치우쳐버린 점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를 향한 복지이고 누구를 위한 안정이냐의 문제가 앞서고 다음에 어떻게 그것들을 실현하느냐의 문제가 따라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은 그것이 거꾸로 돼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열사람이고 백사람이고 간에 상관없이 그저 한마디의 말씀으로 모두를 구원할 수 있지만 경제정책은 항상 재원의 제약을 받는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받쳐줄 수단이 없다면 그 의도만으로는 결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정과 복지의 이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현실에서 그 재원이 마련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하나의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점검하고 다음으로 거기에 맞춰 정책의 목표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바로 이 언저리에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두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그 동원이 가능하다는 수단을 도대체 어떻게 추출해내느냐는 산정방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다음으로는 채택된 방법이 기초하고 있는 전재, 즉 존재하는 현상은 항상 최선의 결과이기 때문에 현실의 개혁이란 결국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상 정책 수립자들이 확보할 수 있는 조정의 잠재적 진폭이 의외로 넓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는 형편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는 것이 습관처럼 돼버렸다. 우리의 정책 담당자들은 걸핏하면 국민들에게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신세 조지지 말고 주는 대로 받으라고 을러대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통치자의 심사가 고약할 때는 이러한 사정이 압제와 폭거의 구실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기존체제를 한층 보강하고 기득권자의 이익을 일층 강화하려는 온갖 시도들이 복지의 희생을 강요할 때도 그것은 흔히 재원의 부족으로 변명됐고 따라서 그렇게 취약한 물질적 바탕 위에서나마 전력을 다하는 집권자의 ‘선의’에 항거하는 세력은 종종 국가보안이나 사회안전의 차원에서 다스려져야 했다.

물론 복지만이 현대의 경제생활에서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지 아프면 병을 고쳐주고, 누구든지 직업을 잃으면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누구든지 집이 없으면 기거할 궁리를 마련해주는 그 저력은 애써 외면하고 하필이면 그 사회의 복지완화의 증세만을 떼어내 들이대면서 최저 임금을 지키려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즐비한 우리 사회의 현상에 대한 변명으로 삼으려고 하는 저의와 기도가 과연 온당한 짓인가를 묻고 싶다.
박 찬 석 / 본지 편집인oneheart@yg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