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사회에는 실용주의며 실용정책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정부 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실용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과연 진정으로 실용의 의미나 제대로 알고서 사용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이란 나라를 동경한 나머지 그 나라에서 한때 유용했던 실용이란 말을 남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념적 대결이 심하고 관념의 유희가 지나칠 때에 가장 인기 있는 용어는 실용이나 실용주의라는 말이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라는 영어의 실용주의가 오늘의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대국으로 만들었던 주의임에는 분명하다. 실용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려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철저한 준법정신과 신의성실의 원칙이 사회생활의 원칙으로 작용하여 현대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실용주의가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기까지는 청교도주의라는 높은 도덕성이 미국의 자본주의 속에 스며 있었고, 신의성실의 원칙이 미국인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하여 효율성과 능률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에 등장한 논리여서 쉽게 실용주의의 탁월한 효과가 발휘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천민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사회적 신뢰성이 상실되어 서로를 못 믿는 세상인데 무턱대고 실용주의만 외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나 큰 오산이다.
이런 실용주의란 말의 홍수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산업은 누가 뭐라 해도 농업이다. 근본적으로 비실용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농업이다 보니 실용을 좋아하는 부류들이 단순히 경제논리나 생산성을 들이밀면 항상 찬밥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1차 산업에서 2차,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경제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농업의 존립기반은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 지난 날, 국가 구성원의 대부분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던 농업국가였던 때만 해도 농업이 아니고는 국민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건만 이제는 농업인구는 급감되었기에 농업으로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시절이라고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농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는 사실을 상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은 경제논리나 생산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가치인 생존의 문제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보다 더한 실용은 없다. 그래서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비실용적인 농업정책을 실용적으로 제시한 일대 개혁안을 내놓았다.
첫째는 편농(便農)이다. 힘들고 고단한 농사일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기계화를 통해 노동력의 합리적인 운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후농(厚農)이다. 착취체제의 온갖 불합리한 제도를 고쳐서 농민들이 후한 소득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상농(上농)이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에서 선비 못지않은 신분으로 농민들의 지위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터진 입이라고 궤변을 떠벌이기에 바쁜 짝퉁 실용주의자만 발부리에 차이고 다산과 같이 깊은 안목을 지닌 진짜 실용주의자는 찾을 길이 막막해 못내 아쉽다.
박 찬 석 / 본지 편집인oneheart@yg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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