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출신 정강철 작가의 신간소설 <수양산 그늘>
■ 영광출신 정강철 작가의 신간소설 <수양산 그늘>
  • 영광21
  • 승인 2012.12.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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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이야기꾼의 걸쭉한 입담과 반전의 서사

등단 23년만에 첫 번째 소설집 출간 … 광주 광덕고에서 교단생활

영광출신의 중견작가 정강철 향우가 등단 23년만에 첫 소설집을 출간했다.

정강철의 소설은 재미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면면을 기발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걸쭉한 입담으로 흥미진진하게 얽어낸다.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강철의 소설은 힘차다. 한정된 공간이나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는 요즘 소설들과는 달리 그의 소설에는 튼튼한 서사와 그 산맥이 거느린 다양한 봉우리와 골짜기가 숨어있다.

그 속에 깃든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이 때로는 암벽이 되고 천길 낭떠러지가 되고 때로는 바위틈 사이 작은 물방울이 돼 골짜기를 적시다가 어느 순간 폭포수로 계곡을 뒤흔들기도 한다.

구성지고 절실하며 눈물겨운 우리들의 세태 속에 그가 담아내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다운 삶,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물처럼 잔잔히 흐르고 성내듯 굽이치며 흘러가는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부지불식간에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깊은 페이소스에 누구라도 젖을 만하다.

소설 7편 다양한 스펙트럼 보여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수양산 그늘>을 비롯해 모두 7편이 수록됐다. 그동안 장편소설만을 펴낸 중견작가가 등단 23년 만에 묶은 첫번째 소설집인 만큼 그 다양한 스펙트럼이 깊이와 폭을 더해준다.

시국사건에 수배 중인 1980년대 후반의 시대상황 <암행>에서부터 인터넷 심부름 대행카페와 음란 커플카페를 운영하는 <그들만의 리그>오늘날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의 폭과 깊이는 매우 남다른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작가가 기존의 어떤 작품을 의도적으로 패러디하는데 그 원전의 모방이 아닌 새로운 비판적 통찰과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운수 좋은 날>은 우리가 잘 아는 현진건의 소설 제목이고,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들만의 리그>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와 페니 마샬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암행>은 1950년대 풍자소설가 김성한의 <암야행>을, <멀고 먼 이웃들>은 김영현의 소설 <멀고 먼 해후>를 떠올리게 한다.

<수양산 그늘> 또한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는 속담과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패러디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더욱 명료하게 부각시키고, 과연 인간다운 삶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해준다는 점이다.

여봐요, 언젠가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를 얘기했던 적이 있었죠? 뱀이 허물을 벗듯, 이라고 했었나? 당신, 순진한 척하는 거야? 아님, 진짜 쌩퉁이야 뭐야? 허물을 벗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자들이 요새 어딨어요? 온라인이란 걸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당신한테는 일기장 검사 맡듯이 검증해 줄 선생이라도 존재하는가요? 늘 신부님 앞에서 고백 성사하는 심정으로 사는 거요? - <멀고 먼 이웃들>

정강철의 입담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그는 주장하거나 외치는 대신 관찰자적 입장에서 소설속 화자의 입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들 삶의 정곡을 찌른다. 이야기꾼으로서 그 솜씨가 탁월한 것이다.

이야기의 반전은 삶의 반전
그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다가 한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독자들의 머리를 아련하게 한다. 예상을 뒤집는 반전을 통해 서사의 갈등구조를 다층화시키고 사건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야기의 반전은 삶의 반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삶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꿈이다. 우리 시대의 현실과 미래를 응축하는 꿈으로 반전 이외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정강철은 1998년에 국내 최초로 중국 조선족 현장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신·열하일기>를 발표했고 2000년에는 전남일보에 저예산 독립영화인들의 애환을 담아낸 소설 <외등은 작고 외롭다>를 연재했다. 2008년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3,000만원 창작지원금 공모에 당선돼 우리의 교육현실을 리얼하게 그린 장편소설 <블라인드 스쿨>을 내놓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내놓은 <수양산 그늘>은 그동안 걸어온 작가의 길을 점자처럼 더듬어 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현재 그는 광덕고등학교에서 24년째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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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팔아 돈 번다는 걸 문학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카프카가 살던 시절 얘기다.
카프카 역시 돈은 일터에서 벌고 영혼은 문학에 바쳤다. 정강철은 카프카적이다.

그는 낮엔 백묵으로 칠판을 채우고, 밤엔 잉크로 종이를 검게 물들인다. 성실한 직장인이자 일상적으로 반듯(하게 보이는)한 정강철은 밤에는 음습하고 불량스럽고 광기에 찬 지하세계(문학)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밤새 연애질을 하던 글과 아침이면 이별해야 하는 고통이 소설 전편에 알싸한 죄책감으로 번지고 쓸쓸함의 정조로 스민다.

글을 사랑한 죄로 처벌을 받고 싶어하는 한 남자의 파토스가 글에 뜨겁게 퍼진다. 백묵과 검은 잉크의 위태롭고 날카로운 경계에 서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노라면, 아프고도 애틋해지는 심정을 어찌할 수 없다.

이화경 / 소설가